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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43.일본 (2)일본교회의 모태 나가사키대교구

이지연 기자
입력일 2007-04-22 수정일 200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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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신앙 소공동체로 묶는다

항구도시이자 관광도시 나가사키는 일본교회의 모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선교를 위해 첫발을 디딘 곳이자 26성인 순교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50여 년간 이어진 박해의 최대 피해지이며, 환란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켜온 일본교회 신앙선조의 땅이다.

때문일까. 국보 오오우라 천주당과 26성인 기념비가 위치한 니시자카 순교지 등 천주교 관련 유적지 상당수가 교구 내에 분포돼 있다. 신자비율도 4.3%로 일본 16개 교구 중 가장 높다.

이처럼 나가사키대교구를 설명하는 다양한 형용사가 붙기까지 이 땅엔 많은 어려움도 함께 했다. 오랜 박해를 받으며 이룬 뼈아픈 일본교회 역사가 교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무역항이 있던 나가사키는 자연스럽게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일본 열도에 복음의 씨를 뿌린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첫 세례를 베푼 곳도 나가사키현 관할 히라도였다.

하비에르가 뿌린 씨앗은 곧 전 지역으로 퍼졌고, 복음의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금교령(1614)을 반포할 당시 전국 가톨릭 신자 50만 명 중 15만 명이 나가사키교구 신자였다. 이것만으로 가톨릭이 나가사키지역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초의 대신학교가 개교를 했으며, 1601년에는 일본인 첫 사제도 탄생했다.

하지만 1587년부터 이어진 박해는 교구의 모든 명성을 앗아갔다. 선교사들은 추방됐고 더 이상 사제를 양성할 수도 없었다. 신자 대부분은 순교하거나 박해를 피해 고또, 히라도 같은 외딴 섬으로 숨어 들어갔다. 나가사키에 남은 이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박해로 인해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 활동을 해야만 했다. 지금은 비석으로만 존재하는 △산타 글라라 교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당 △성 마리아당 △성 요셉당 등 비밀성당에서 미즈카타(세례를 주는 평신도)를 통해 세례성사가 근근이 지속될 뿐이었다.

기도모임도 가족끼리 은밀하게 이뤄졌다. 난도카미(納戶神,박해를 피하기 위해 불상 뒤에 예수나 성모의 모습을 몰래 새겨놓은 상)도 확실한 가톨릭신자에게만 공개했다. 또 매년 이뤄지는 호구조사에서 신자들은 예수상을 밟고 지나가며, 신자가 아님을 증명해야했다.

신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종교를 숨기며 250여년을 보냈다. 막부는 더 이상 가톨릭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1864년 15명의 신자가 오오우라 천주당에 나타나면서(잠복 기리스탄 발견: 잠복 그리스도교인의 발견) 일본과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놀라게 한다.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교구 신자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 깊은 신앙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를 외부로 드러내기 보다는 개인 신심 위주로 신앙 활동을 하고 있다. 이는 일본교회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복음을 일으키는 촉매제만 있다면 교구 신자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충분한 것. 나가사키대교구는 촉매제로서 ‘소공동체 운동’을 선택했다. 성경과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 를 제공하고,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신앙을 나누기 위해 2002년부터 운동을 펼치고 있다.

교구는 이 운동을 통해 신자 자신이 복음화 될 뿐만 아니라 전교활동의 주춧돌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줄어들고 있는 젊은 신자들이 신앙을 되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갈 계획이다.

소공동체 운동 시행 5년째.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인들에게 다른 이들과 고민, 생각 등을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교구는 성급하지도, 교구민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강습회를 열어 운동의 장점과 방법 등을 알리고 있으며, 각 본당에서 이뤄지는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교구장 다카미 미쯔아끼(高見三明) 대주교는 “소공동체 운동을 시작한지 5년째지만 아직 한국교회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라면서 “조급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천천히 진행하며 가톨릭이 생활 속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한국서 작은교회 정신 배워”

◎나가사키대교구와 한국교회의 관계

일본교회와 한국교회의 인연은 임진왜란(1592~1598)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가톨릭을 접하고, 그 가운데는 세례를 받는 이들도 생겨났다. 조선인 신자는 점점 늘어나 1595년에는 300명이 넘게 된다.

이후 그들은 자기 힘으로 교회를 세울 만큼 성장하게 되고, 일본 교회 역사와 함께 한다. 엄한 금교령과 심한 박해 아래서도 조선인들은 열정적으로 포교하고,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박해는 외국인에게도 대단했다. 순교자 가운데 조선출신 신자가 다수 포함돼 있다. ‘일본순교복자 205인’ 중 10명이 조선인으로 순교자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신도 발견 25주년인 1890년에는 선교 방법, 신자교육, 자국 성직자 양성 방법 등을 정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 양국 주교회의가 나가사키에서 제1회 시노드를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도쿄, 나가사키, 오오사카대교구 교구장이 참석했으며, 도우세 신부가 출석했다.

1942년 제3대 대구대목구장으로서 일본인 하야사카 이레네오 주교가 취임하고, 와키타 아사고로 신부도 역시 한국교회에서 활동하게 됐다. 두 일본 성직자는 한국 선교 사목자로서 일본제국주의의 무리한 요구와 탄압에서 가톨릭교회를 보호하였다. 하야사카 주교는 2년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재임했으나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46년 1월 6일 대구주교관에서 선종했다.

이후에도 두 교회는 관계를 지속한다. 현재 나가사키대교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도 역시 한국교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구는 소공동체운동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서울대교구를 여러 차례 방문하고 지금도 자문을 구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환란과 원폭의 아픔 딛고…

◎수난과 평화의 상징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

우라카미는 많은 가톨릭신자가 신앙을 지켜낸 지역이다. 또 ‘원자폭탄 투하’라는 수난을 받은 땅으로 평화를 생각하는데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우라카미 성당은 이 두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됐지만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우라카미 4번째 박해’(1867~1873)가 일어나면서 우라카미 신자 3994명이 전국 22개소로 유배되는 수난이 이어진다.

이러한 환란 가운데 세워진 우라카미 성당은 ‘동양 제일’이라 극찬을 받을 정도로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건립 20년경 원폭에 의해 많은 인명피해를 내며 미진으로 건물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말았다.

전후에 폐허 일부를 보존하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1969년 그 자리에 새성당을 건립했다. 지금까지도 성당 주변 곳곳과 나가사키 평화의 공원에서는 원폭 피해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설명

▶나가사키대교구는 2002년부터 소공동체 운동을 실시해오고 있다. 교구는 강습회를 열어 운동의 장점과 방법 등을 알리고, 각 본당에서 이뤄지는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2003년 한국을 방문한 나가사키대교구 방문단이 서울대교구 염수정 주교, 교구 사제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소공동체 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원폭 피해로 훼손된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의 흔적.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