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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충만한 토착화, 건강한 아시아 복음화의 길

입력일 2007-04-15 수정일 200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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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과 ‘대화, 우애, 협력’을

지금까지 예수 사건에 대한 믿음의 응답 주체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온 몸과 감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온 이성으로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을 어떻게 토착화할 수 있는지 검토하였다. 그리하여 감성과 이성과 실천 체험이 우리의 신앙 해석과 신앙 살이에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를 가능한 한 총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신학이란 개인의 산물인 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창조물과 함께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본 이성과 온몸으로 하는 토착화 신학의 사례들은 신학 주체의 신앙 공동체와 사회의 생명의 질을 예수께서 선포하고 증거하신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조시켜서 보다 더 충만한 형태로 고취하기 위한 투신이었다.

이와 같은 공동체 차원의 토착화 양상을 보다 더 명시적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청중으로 하여 신학을 수행한 한 모델로서 마태오 복음서 저자의 예수 이야기를 그의 민족적 정체성과 통합하여 돌아보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생명의 축복과 정의의 다스림을 함께 나눌 이웃 공동체를 단순히 인간에 한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온 창조물까지 포용하여 토착화 신학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하느님의 평화의 다스림을 ‘생태학’과 통합한 21세기형 ‘창조 신학’ 비전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인류 공동체가 하느님께 창조된 만물 공동체와 함께 자각하고 구현해 갈 신학과 신앙 실천의 방향을 살펴보았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삼위의 하느님이 생명을 낳고 기르며 그 모든 생명이 그분들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충만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모든 신학이 비롯된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하느님과 아드님과 성령이 나누시는 생명의 소통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온 우주 만물과 인간이 저 생명의 복된 나눔에 참여하여 이것을 자신과 이웃과 온 창조계에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축복이자 사명이다. 그리고 바로 이 원초적 은총과 과제에 오늘 우리가 신학을 할 수 있는 근거와 목표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큰 틀 위에서 이제 말할 수 있다. 토착화에는 낮은 단계와 깊은 단계가 있다고.

토착화를 서구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기획하면서 이것을 절대화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비록 그리스도 신앙을 알지 못하나, 지구 전 지역에서 문화와 종교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하느님 생명의 다스림을 건강하게 소통시킬, 사변적으로는 물론 실천적으로도 가능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 증거하는 것처럼, 그 가능성을 파괴할 수조차 있다.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자기 안에 가둘 때 이들은 피상적-폐쇄적-단절적-적대적-폭력적 신학-신앙 실천을 발생시키기 쉽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연 창조물에 대해서는 인간 중심으로, 여자들에 대해서는 남자 중심으로, 그리고 있는 자, 배운 자, 권위와 책임을 점유하는 자 중심으로 자신들의 신학-신앙 해석과 실천을 관철시키려 할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깊은 토착화는 삼위의 자유와 존중의 관계 위에서 그분들이 소통시키기를 원하시는 생명의 질서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길러가게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된 만물 공동체의 살림에 개방적이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준거로 하느님의 만물 가족과 대화와 우애와 협력 위에서 관계를 형성해 가고자 진력한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깊은 차원에서 자신의 민족적,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에 부합한 예수 이해를 갖추고, 한국‘에 있는(in)’ 교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of)’ 가톨릭 교회 상태를 성취하는 것은 동아시아 복음화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만일 여전히 “유럽에서 수입한 예수-한국에 이식된 서구 교회” 수준을 주체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한국‘의’ 교회를 구현하지 못할 때, 아시아 다른 지역에 가서도 유럽화된 예수와 한국에 이식된 서구 교회를 이식하려 들기 쉬울 것이다.

이때는 우리의 복음화 노력이 도리어 아시아 지역 교회 구성원들의 영을 분열시키고 갈등하게 만들기 쉽고, 종국적으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교가 “복음”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이른바 “악음”으로 체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수조차 있는 것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