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국교회사 인물 80] (하)

유재우 기자
입력일 2007-04-08 수정일 20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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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남 대주교, 격동기 교회발전 공헌

김홍섭, 평생을 사형수 교화에 헌신

교회용어 개정 기여 서창제·한국 성화 개척자 장발

한국 문단 거장 정지용·최초 몬시뇰 김창현 신부

교회 출판 창달 앞장 윤형중 신부·인술 펼친 박병래

아동문학회 창립 마해송·소외계층 사랑실천 오기선 신부

빈민운동가이자 정치가 제정구·나환우 대부 이경재 신부

한국 최초 교황대사 장인남 대주교·가톨릭문학 선도 구상

해방 이후

8.15 해방 이후 격동기의 한국 교회는 실로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일군 시기였다.

17년간 장로교 목사로 재직하다가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염증을 느껴 가톨릭으로 개종한 서창제. 그는 개종 후 전국을 순회하며 전교활동을 펼쳤으며 주교회의 산하 가톨릭 공용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교회 용어 개정과 토착화에 기여했다. 또 교회의 현대화와 사회참여, 평신도 사도직과 신자 재교육을 적극 주장했다.

수도회의 창설도 시작됐다. 방유룡 신부는 1946년 4월 개성본당 사무실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했다.

이어 1957년 3월에는 재속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삼회’를 설립하고 1962년 10월에는 기혼여성과 미망인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인 ‘빨마회’의 설립을 윤병현·홍은순 수녀에게 허락해 명실상부한 한국순교복자수도회 대가족의 창립자가 됐다.

김상기는 한국동양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세례 후 병인순교 100주년을 맞아 절두산순교자기념관을 마련 할 때 김대건 신부가 쓰던 칼, 안중근 의사의 친필엽서, 정약정의 수택본사기 6권 등을 전시유물로 기증했다.

이와 함께 1971년 고서 1만470여권 서울대 기증했다. 여기에는 이조 태종 정유본 등 문화재급 희귀본 500여권 등이 포함돼 있다.

베네딕도회 소속인 슈레플 신부. 그는 1927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됐고 1954년 재임명돼 부산 성 분도병원 지도신부로 재임했다.

그는 수련자 교육을 위해 헤르베겐 아빠스의 저서 ‘성 베네딕도의 성격 묘사’, ‘성 베네딕도가 주신 성훈의 진수’, ‘성 베네딕도의 성규’ 등을 번역했고 1964년 분도출판사 책임을 맡아 교회 출판문화에도 기여했다.

“나는 원래 제대벽화에 취미가 있고 또 그것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치고자 합니다”고 말했던 장발.

그는 1920년 첫 성화 ‘김대건 신부’(1920년)를 비롯해 명동대성당 ‘14제자화’(1926년) 등 수많은 성화를 그리며 한국교회 성화의 개척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6.25 사변 전후 교회

1942년 12월 교황 피우스 12세에 의해서 주교에 임명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된 노기남 대주교. 그는 ‘경향신문’을 창간했으며 대주교 및 서울대교구장으로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했다. 격동기 한국 교회를 이끄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대한민국 국민 훈장, 이탈리아 문화훈장 등을 받으며 일제 강점기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시인 정지용은 가톨릭과 민족주의, 모더니즘을 추구했던 한국문단사의 거장이었다. 그는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 재학 중 가톨릭에 귀의해 장면, 박준호 등과 ‘가톨릭 청년’을 창간, ‘별’, ‘갈릴레아 바다’ 등 신앙을 주제로 한 자작시를 발표했다.

1961년은 교회가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해였다. 광주대교구 김창현 신부가 그 해 7월 광주대교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울반 명의 몬시뇰로 서임된 것이다. 그의 몬시뇰 서임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명의 몬시뇰 서임이다.

윤형중 신부 만큼 교회 언론 출판 창달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는 드물다. 그는 1933년 서울교구 출판부 보좌로 임명된 후 그 해 6월 ‘가톨릭 청년’ 창간에 일조, 편집장에 취임했다.

가톨릭 청년이 폐간된 후 1937년부터는 ‘경향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의 결성을 추진했다. 윤신부는 일제시기부터 순교자 현양에 앞장 선 선각자로도 평가를 받는다.

박병래는 성모병원 초대 및 3대 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1947년 4월 가톨릭 신자 의사들을 주축으로 전교 및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방지거 사베리오회’(한국가톨릭의사협회 전신)를 창설했다.

또 1950년 서울이 수복 된 후 가톨릭 의사 협회 회원들과 함께 ‘가톨릭 의료 봉사단’을 조직, 환자 진료를 펼쳤다. 그는 삶의 우선 순위를 언제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로 두었다.

교회 건축물 발전도 진일보한 시기였다. 독일 뮨스터슈바르짜크 수도원 소속 알빈 슈미트 신부. 그는 1961년부터 17년간 김천 평화동 성당을 비롯해 성당 79개, 공소 30개, 부속성당 14개, 61개의 병원·학원 등 184개 건물 신축 설계와 9개의 건물 증축·설계해 교회 건축물이 근대 지향적으로 나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54세에 천주교에 입교한 마해송. 그는 1954년 아동 문학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지인들과 ‘한국아동문학회’를 창립했으며 1957년 ‘어린이 헌장’의 기초를 놓았다. 마해송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신앙생활을 했으나 “그저 천주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하며 삶을 살았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수련장인 장정온 수녀. 그는 메리놀 수녀회에 동양인 최초로 입회했으며 6.25 전쟁 중에도 영적 도서의 지속적인 번역을 통해 수도자의 영적 풍요로움을 더하고자 노력했다.

유영근 신부는 일제시대 우리 시조 백수(百首)를 담은 카드 놀이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는 동시에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1942년 ‘수선탁덕 김대건’이란 제목으로 전기를 간행했으며 최양업 신부 관련 자료를 수집해 ‘최토마스 신부 전기’를 집필했으나 완성은 하지 못했다.

교육자이며 문필가인 김익진은 1936년 불교에서 천주교로 입교했다. 해방 후 자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고 재산을 광주대교구에 헌납했다.

6.25 동란 중에는 ‘가톨릭시보’의 편집인으로 활약했다.

윤을수 신부는 인보성체수도회를 창설했다. 1939년 7월 ‘조선의 유학사론’이라는 논문으로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교회 최초의 박사 신부로 졸업했다. 학자나 후배 사제 양성보다 가난한 병자나 고아들의 구호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오기선 신부는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일제의 계획을 막기 위해 1941년 12월 도일,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를 설득해 서울교구장에 한국인의 임명을 가능하게 했다.

동생 오기순과 함께 한국 최초의 형제 신부가 됐으며 한국전쟁 중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광복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속에서 사회적 소외 계층을 종교적 사랑으로 수용해 3000여명에 이르는 고아들을 돌봤다.

그는 이와 같은 공로로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 받았다.

1934년 6월 한국에 입국한 코요스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인 그는 6.25 발발로 인해 함경도 등지로 끌려가 수용 생활을 한 후 1953년 3월 석방됐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나의 북한 포로기’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전쟁의 실상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삶을 증거하였다는 공로로 195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상 수상했다. 이후 1955년 재입국해 1962년 2월 제2대 안동 감목 대리구장 임명, 교구 설립의 기반을 조성했다.

견고한 뿌리내림

김성환 신부는 교회 최초로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을 조직하는 등 전교에 주력, 4년 재임 기간 동안 1400여명의 영세자를 탄생시켰다.

역사학자이며 한국 교회사 연구가인 유홍렬. 1936년 천주교로 개종한 그는 주교·평신도 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특히 ‘평신도의 날’을 재임 시절 주교단에 건의 제정하고 103위 복자 시성 운동에 앞장섰다. 1949년 ‘조선 천주교회사’ 상권 발간 및 1962년 ‘한국천주교회사’ 출판 등 다수의 교회서적을 발간했다.

1960년 대법원 판사가 된 김홍섭. 1965년 선종한 그의 장례 당일 10여명의 사형수 대자 사진이 고인의 사진과 함께 걸렸다. 그는 평생 사형수들의 교화에 열정을 쏟은 신앙생활을 했으며 1985년 정경문화지 ‘해방 후 한국 인물 40인’의 한사람, 1995년 MBC가 5대 도시에 재직하는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로 꼽히기도 했다.

선종완 신부는 공동번역 구약성서를 번역한 성서학자이다. 그는 ‘말씀으로 산 사제’의 모습을 보였다. 말씀을 기반으로 한 그의 삶은 자신이 설립한 ‘성모영보수녀회’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915년 한국에 입국했다 수차례 입·출국을 반복한 필립 크로스비 신부. ‘죽음의 행진’에 끌려가 3년 만에 석방된 그는 58년간 한국에서 선교사제로 살았다. 2003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체포된 3년간의 포로 생활을 체험한 수기 ‘기나긴 겨울’을 통해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십자가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 가는 선교 사제의 삶을 드러내 한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김경우 신부는 1956년 11월 부산에서 처음으로 꾸리아를 창단했으며 1964년 11월 본당 주보 ‘겨자씨’를 교구에서 가장 먼저 발간했다.

1949년 한국 최초로 로마 교황청 음악대학에 유학한 이문근 신부. 그는 1952년 작곡과 석사, 1955년 작곡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57년 주교회의 가톨릭 성가집 발간위원회 대표로 ‘정선 가톨릭 성가집’ 출판하는 등 한국 교회음악의 초석을 다졌다.

김동한 신부는 1951년 해군의 첫 군종 신부로 입대했다. 1953년 4월 진해 및 인근 본당들과 함께 ‘군민 합동 성체대회’ 개최했으며 이 대회는 진해 지역의 천주교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1978년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 조직하고 초대 회장 선임됐다.

예수회 김태관 신부는 가톨릭대학생 운동의 요람인 ‘뉴먼 클럽’(Newman Association)을 조직, 많은 대학들을 가입토록 했으며 1985년 국민 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1990년 4월 서강대 신학원 강의실에서 수련자들에게 수업하던 중 선종했다.

평신도들의 활발한 활동

한국현대시사에서는 물론 한국가톨릭문학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구상. 그의 시작세계는 가톨릭 문학의 활성화에 큰 힘과 동기를 부여했다. 가톨릭신문이 제정한 ‘한국가톨릭문학상’의 운영위원장으로서 상의 제정과 운영 및 가톨릭적 작품 발굴에도 큰 힘을 쏟았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포함됐다.

1971년 평신도 최초 가톨릭대 신학부 청강생으로 등록한 양한모. 1997년 유족들이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톨릭신학연구와 교회내 학문 발전을 위한 기금을 가톨릭신문사에 기탁, 가톨릭학술상이 제정됐다.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한 지학순 주교. 지주교는 민주화·평화·인권 운동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며 사후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이 만들어져 그의 뜻이 이어져 오고 있다.

가톨릭음악가협회 부회장이었던 윤용하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과 순수성을 지키며 서정적인 작품을 남겼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김수환 추기경. 그는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했다.

김창석 신부는 1953년 전장(戰場)에 부임한 최초의 군종 신부이다. 그는 언론인들의 친목 모임인 다산회를 조직했다.

‘나환우의 대부’, ‘한국의 다미안 신부’로 불렸던 이경재 신부. 그는 1956년 8월 서울대교구 최초 ‘레지오마리애’를 도입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유현석. 그는 명동 구국선언문 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 등 주요 시국공안사건을 맡아 정의 실천에 노력했다.

1970년 최연소 주교로 서품된 정진석 추기경. 정추기경은 2006년 3월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추기경에 서임됐다. 또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북한 교회 재건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배문한 신부는 1994년 8월 5일 서정동본당 신자들과 회갑축하 겸 휴가차 강원도 삼척 성 바오로 수녀원 앞 해수욕장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 신자 3명을 구조한 후 사망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신성인이라는 큰 사랑을 실천했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설에 참여한 김승훈 신부. 그는 1987년에는 고 박종철군 고문 은폐, 축소 조작사건을 폭로함으로써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제정구는 빈민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빈민촌 강제철거에 맞서 투쟁했으며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장인남 대주교는 2002년 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방글라데시 교황대사 및 대주교로 임명돼 한국교회 최초 교황대사가 됐다.

◆한국교회 40명 인물 (이름/연대/업적)

41.서창제(徐昌濟, 토마스) / 1899~1971 / 교회 용어의 개정과 토착화에 기여

42.방유룡 신부(方有龍, 레오) / 1900~1986 /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및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창설자

43.김상기(金庠基, 세자 요한) / 1901~1977 / 한국 동양사학의 기초를 세움

44.슈레플 신부 / 1901~1990 / 수련자 교육에 힘씀, 1964년 분도출판사 책임

45.장발(張勃, 루도비코) / 1901~2001 / 한국 교회 성화의 개척자

46.노기남 대주교(盧基南, 바오로) / 1902~1984 / 한국 교회 최초의 주교

47.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 1902~1950 / 한국 문단사의 거장

48.김창현 신부(金昌鉉, 바오로) / 1902~1969 / 한국 교회 최초의 명의 몬시뇰 서임

49.윤형중 신부(尹亨重, 마태오) / 1903~1979 / 교회 언론 출판의 창달에 힘씀, ‘가톨릭청년’ 창간

50.박병래(朴秉來, 요셉) / 1903~1974 / 성모병원 초대 및 3대병원장, ‘방지거 사베리오회’ 창설

51.알빈 슈미트 신부 / 1904~1978 / 1950년대 한국교회 건축물이 근대지향적으로 나가는데 공헌

52.마해송(馬海松, 프란치스코) / 1905~1966 / ‘한국아동문학회’ 창립, ‘어린이 헌장’ 기초놓음.

53.장정온(張貞溫, 앙네다) / 1906~?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초대 수련장, 메리놀 수녀회 동양인 최초 입회

54.유영근 신부(兪榮根, 요한) / 1906~1950 / ‘수선탁덕 김대건’ 전기 간행

55.김익진(金益鎭, 프란치스코) / 1906~1970 / 교육자·문필가, 6.25 동란 중‘가톨릭시보’ 편집인

56.윤을수 신부(尹乙洙, 라우렌시오) / 1907~1971 / 인보성체수도회 창설자, 한국 최초의 박사 신부

57.오기선 신부(吳基先, 요셉) / 1907~1990 / 일제시대 서울교구장에 한국인의 임명을 가능하게 함, 한국최초의 형제 신부

58.코요스 신부(첼레스티노) / 1908~1993 / ‘나의 북한 포로기’ 저술

59.김성환 신부(金成煥, 빅토리오) / 1911~1982 / 한국 교회 최초로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 조직

60.유홍렬(柳洪烈, 라우렌시오) / 1911~1995 / 역사학자·한국 교회사 연구가, ‘평신도의 날’을 주교단에 건의해 제정

61.김홍섭(金洪燮, 바오로) / 1915~1965 / 대법원 판사, 평생 사형수들의 교화에 열정을 쏟음. ‘해방 후 한국 인물 40인’의 한사람으로 뽑힘

62.선종완 신부(宣鍾完, 라우렌시오) / 1915~1976 / 공동번역 구약성서를 번역한 성서학자, 성모영보수녀회 설립

63.필립 크로스비 신부 / 1915~2005 / ‘죽음의 행진’에 끌려감. 한국전쟁 당시 포로 생활을 체험한 수기 ‘기나긴 겨울’ 발간

64.김경우 신부(金慶佑, 알렉시오) / 1916~1978 / 부산에서 처음으로 꾸리아(‘임마꿀라따’ 꾸리아) 창단

65.이문근 신부(李文根, 요한) / 1917~1980 / 한국인 최초로 로마 교황청 음악대학에 유학, 한국 교회음악의 초석을 다짐

66.김동한 신부(金東漢, 가롤로) / 1919~1983 / 해군의 첫 군종 신부,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 조직

67.김태관 신부(金泰寬, 토비아) / 1919~1990 / 가톨릭대학생 운동의 요람인 ‘뉴먼 클럽’조직, 서강대 신학원 강의실에서 수련자들에게 수업하던 중 선종

68.구상(具常, 세례자요한) / 1919~2004 / 한국현대시사에서는 물론 한국가톨릭문학사 중요한 인물,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시인에 포함

69.양한모(梁漢模, 아우구스티노) / 1921~1992/ 1971년 평신도 최초 가톨릭대 신학부 청강생 등록, 가톨릭학술상 제정

70.지학순 주교(池學淳, 다니엘) / 1921~1993 / 민주화·평화·인권 운동에 힘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함

71.윤용하(尹龍河, 요셉) / 1922~1965 / 작곡가, 음악의 신동이라 불림

72.김수환 추기경(金壽煥, 스테파노) / 1922~ / 한국 교회 최초의 추기경,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

73.김창석 신부(金昌錫, 다태오) / 1926~1993 / 전장(戰場)에 부임한 최초의 군종 신부

74.이경재 신부(李庚宰, 알렉산드르) / 1926~1998 / ‘나환우의 대부’, ‘한국의 다미안 신부’등으로 불림, 서울대교구 최초 ‘레지오마리애’ 도입.

75.유현석 변호사(柳鉉錫, 사도요한) / 1927~2004 / 한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 박종철고문치사사건 등 주요 시국공안사건 해결에 앞장

76.정진석 추기경(鄭鎭奭, 니콜라오) / 1931~ / 한국 교회 최연소 최연수 주교 서품, 두 번째 추기경 서임,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북한 교회 재건에도 주도적 역할

77.배문한 신부(裵文漢, 도미니코) / 1934~1994 /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한 신자 3명을 구조한 후 사망, 살신성인이라는 큰 사랑을 실천

78.김승훈 신부(金勝勳, 마티아) / 1939~2003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설에 참여, 고 박종철군 고문 은폐·축소 조작사건 폭로

79.제정구(諸廷丘, 바오로) / 1944~1999 / 빈민 운동가이자 정치가, 막사이사이상 수상

80.장인남 대주교(張仁南, 바오로) / 1949~ / 한국 교회 최초의 교황 대사

유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