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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신부이야기] 22.희망마저 잃지 않도록…

입력일 2007-04-08 수정일 200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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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씨알’이란 곡식의 종자로 쓰는 낱알을 말하는데 그 단어에서 유래한 말들은 너무나 많다. ‘씨알데기 없다 - 쓸모 없다.’ ‘씨알머리 없는 소리 - 근원도 없는 소리’ 등이다.

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라는 말은 볍씨인 종자를 까먹어 버리니 일년 농사를 망치는 미련한 말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예로부터 농사짓는 사람에게 있어서 씨나락은 단순한 종자 씨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나락을 먹지는 않는다. 씨나락을 없앤다는 것은 희망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을에 수확을 하면 가장 충실한 놈으로 먼저 씨나락을 담아 놓고, 남는 것을 양식으로 쓴다. 그리고 겨울을 지낸 후 새봄에 그 씨나락을 못자리 판에 뿌린다. 그런데 발아가 잘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귀신이 씨나락을 까 먹었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귀신이 까 먹은 씨나락은 보기에는 충실하게 보여도 못자리 판에 뿌렸을 때 싹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씨나락에 얽힌 이야기 중에서 재미있는 경상도지방의 유래를 잠깐 소개해볼까 한다.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 바람에 모의 발아가 안 되어서 농사를 망친 박 노인은, 신경이 몹시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든지 이번에는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지 못하게 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씨나락은 지금 헛방의 독에 담겨져 있다. 밤잠이 별로 없는 박노인은 온 밤 내내 헛방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뽀시락’ 소리만 나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기 무슨 소리고? 틀림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진 박 영감은 이제 바람이 문짝을 조금만 건드려도 달려나가, 온 집안을 돌며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이다시피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떤 날은 하루 저녁에도 두 세 번씩 밤중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가게 되자, 온 집안 식구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일로 완전히 노이로제에 걸리고 말았다.

“영감, 잠 좀 잡시더. 꼭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는다 카는 증거도 없는 기고, 또 귀신이 씨나락을 까먹을라꼬 마음 먹으모 그런다꼬 못 까묵겠소.”

보다 못한 할멈이 영감을 붙들고 사정을 해 보지만, 박 영감의 고집을 누가 꺾으랴. 그 해 겨울 내내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가족들은 거의 매일 밤잠을 설치다 보니 만성적으로 잠이 부족하게 되어 도무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쯤 되자, 효자로 소문 난 아들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은 기어이 아버지에게 대 들었다.

“아부지, 제발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좀 하지 마이소. 고마 미치겠십니더.”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제발 그런 소리를 안들었으면 좋겠다.

허정현 신부 (수원교구 당수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