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르포 '하늘·땅·물·벗'] 벗/ 필리핀 이주여성 홍지아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7-04-01 수정일 2007-04-01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아기야 사랑해~ 한국도 사랑해~”

필리핀 떠나 충주로 시집 온 지 7년

남편과 함께 소 키우고 농사 지으며 정성껏 노부모 모시는 ‘1등 며느리’

영어 강사 충주 사과 아줌마로 활동

결혼이민자센터서 ‘상담자’ 역할도

“먼저 한국과 친구 되려고 노력해요”

“어텐션 풀리즈”

선생님 말에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일순 긴장한다. 호랑이 선생님이다. 조금이라도 한 눈을 팔면 매서운 질책이 떨어진다. 선생님은 칠판에 한가득 영어단어를 쓰고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원(one)” 아이들이 조용하다. ‘어라, 반응이 없네?’ 선생님이 다시 한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제서야 아이들도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원”

“넥스트, 투(next two)”

“투”

“넥스트, 쓰리(next three)

“쓰리” …. 아이들이 호응을 보이자, 선생님도 신이 났다. 이번에는 돌아가며 한명씩 일으켜 세워 읽어보게 한다.

학생들은 전교생 52명에 불과한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세성초등학교. 선생님은 인근 충북 충주시 살미면 내사2리에 사는 필리핀 아줌마 홍지아(티아이 아니스타지.34)씨다.

2000년 남편 홍운석(43)씨를 만나 한국에 와, 이제는 어엿한 ‘베테랑 농사꾼’이 됐다. 영어 강사는 농사일 틈틈이 학교에 와서 봉사로 하는 활동이다.

홍씨는 마을에서도 소문난 ‘맏며느리감’이다. 시어머니 신경림(67)씨는 “우리 며느리가 최고”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고,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의 칭찬에 “친정 어머니 처럼 서로 뜻이 통해요. 시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예요”라고 응수한다. 지아씨 성이 남편과 같은 홍씨인 것은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필리핀 풍습에 의한 것이다.

수업을 끝내고 교실 밖으로 나온 지아씨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다.

조금 전 수업시간의 엄격한 호항이 선생님이 아니다.

넉넉한 미소와 아무데나 털석털석 앉는 폼이 영락없는 한국의 시골 아낙이다. “아이들의 산만한 주의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수업시간에 조금 엄하게 해요. 그래도 아이들은 모두 내가 좋다고 하네요.”

한국으로 올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음식. “처음에는 김치와 된장, 고추장을 보고, ‘앞으로 이런 음식을 평생 어떻게 먹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한국 음식 잘 먹고 잘 만들어요. 요리 솜씨도 좋다는 말 많이 들어요(웃음). 너무 살이 쪄서 고민이라니까요.”

지아씨 가족은 다양한 작물을 조금씩 재배하는 가족농. 송아지를 포함해 소 5마리를 키우고 고추, 배추, 콩 등 밭농사에 벼농사까지 짓는다. 시부모님이 모두 몸이 불편해 농사일은 남편과 지아씨, 두 사람이 모두 도맡는다. 여름에는 새벽 4시에, 겨울에도 적어도 6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법 했다. 지아씨는 솔직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처음 소에게 여물을 먹이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몸이 덜덜 떨리더라구요. 하지만 농사일은 하나 둘 배우면서, 일이 익숙해 지기 시작했고 농촌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어요. 자라나는 소와 작물을 보면서 보람도 많이 느끼구요.” 지아씨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음식도, 힘든 농사일도 아니었다. 언어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도, 오고 나서도 한글 공부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도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웠어요. 한국어는 영어보다 정말 어렵고 복잡해요. 예절 용어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처음에는 남편에게 반말한다고 혼나기까지 했어요. 7년이 지난 이제야 조금 익숙해 졌습니다. 하긴 지금도 사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요.”

말도 그렇지만 한국 농촌 사회의 예절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네 어른을 만나면 일일이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는 것이 익숙해 지지 않아 한동안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식탁이나 의자를 사용하지 않는 문화도 힘들었다. 온돌은 마음에 들었지만, 하루종일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부부관계도 초창기에는 힘들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든 대부분의 부부관계에 사소한 문제나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 남편과는 특히 의사 소통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모든 어려움은 활달한 지아씨 성격에 묻혔다. 지아씨는 영어 강사로 활동하는 틈틈이 충주결혼이민자지원센터에서 필리핀 회장으로 활동한다. 지아씨 보다 뒤늦게 한국에 시집온 필리핀 여성들을 돕는 일이다.

동료 필리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지아씨 눈시울이 붉어진다. 지아씨는 “상담하면서 만난 많은 이들의 아픔이 떠오른다”며 “외국 아내를 맞는 한국 농촌 남편들이 문화에서 오는 차이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고, 오갈곳없는 외로운 아내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듬직한 필리핀 맏언니다. 이뿐 아니다. 지아씨는 또‘충주 사과 아줌마’로서 충주 사과 홍보에도 열심이다. 필리핀 아줌마가 충주 사과를 홍보하면 그 자체로 효과 만점이라는 것이 시(市) 관계자의 설명.

지아씨 스스로도 이런 활동들을 즐긴다. 이는 쉽지 않은 한국 농촌생활을 이겨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농사꾼’ 지아씨에게 유기농법을 아느냐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하늘, 땅, 물, 벗’의 친 환경 농법과 바른 먹거리를 생각하는 유기농의 장점에 대해 아는 선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지아씨는 알 듯 모를 듯 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거 너무 어려워요. 잘 모르겠어요. 저에게 나중에 자세한 자료 보내주세요.”

낯선 이국 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는 지아씨는 “좋은 것은 뭐든지 다 해야 하는 것 아니야”고 말했다. 넉넉한 마음이 또한번 읽혀졌다.

지난 1월, 지아씨 가정에 경사가 생겼다. 지아씨가 결혼 7년여 만에 첫 딸을 순산한 것. “아기야. 사랑해 아기야. 엄마야. 엄마가 왔어.”

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지아씨가 이제 100일도 되지 않은 딸을 챙긴다. 지아씨는 아기를 들어 가슴에 꼭 안았다.

“이 아기를 사랑해요. 그리고 남편과 시부모님을 사랑해요. 이 아기를 낳을 수 있게한 한국도 사랑해요.”

넉넉한 농촌 아줌마 지아씨는 우리들의 벗이었다. 우리가 벗으로 부르기를 망설일때, 지아씨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 벗으로 부르고 있었다.

▨ 농초정보문화센터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농촌지역 국제결혼가정은 모두 1만4000명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농림어업분야 혼인 8027건 중에 외국여성과의 혼인건수는 모두 2885건(35%)으로 전년(1814건)에 비해 1071건(59%)로 늘어났다.

통계청이 밝힌 농림어업 종사의 외국여성과의 결혼 건수는 2005년을 기준으로 모두 2885건이었고, 국적별로 보면 베트남(1535건), 중국(984건), 필리핀(198건) 순 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설명

▶강의 후 사진을 찍자는 권유에 아이들은 저마다 재밌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속에 선 지아씨의 표정에서 편안한 즐거움이 묻어난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지아씨.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