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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차동엽 신부 특별기고 - 도올에게 답한다

입력일 2007-04-01 수정일 200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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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안된 ‘가설’의 유포는 선동에 가까워”

구약(성경) 무용론은 신학의 기초 부실한 탓

교회 오류 많았지만 끊임없이 회개 쇄신

“그리스도교 비전문가인 도올은 과대망상증을 버리고

전문가에게 유보할 줄 아는 도량이 필요하다”

도올 김용옥(59) 세명대 석좌교수의 그리스도교 비판은 그의 독특한 캐릭터와 대중에게 어필하는 매력, 다수를 상대로 하는 대중 강연, 그리고 언론 매체를 통한 논란의 증폭 등으로 소홀히 대응할 수 없다.

파격적인 형태와 내용의 강연과 저술을 통해 그가 불러오곤 하는 파장과 논란은 크게 세 가지 반응을 야기한다. 하나는 발끈 하는 감정적 대응과 격렬한 반발, 다른 하나는 차근차근 그의 논리의 모순성을 지적하는 이성적 대응, 또 다른 하나는 무시다.

대체로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대응의 대응이라는 전통적인 노선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와 성경에 대한 가르침까지도 도마 위에 올리는 도올의 화법에 대해서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이에 따라 도올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가며 반박하고 있는 차동엽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의 특별기고를 통해 그의 주장에 대해 신자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 일단을 살펴본다.

도올이 여러 종교를 넘나들면서 거의 전문가적인 권위로, 그것도 학문적 검증을 거치는 과정 없이 위험한 주장들을 대중 앞에서 강의하는 것은 학문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과 같은 주장들은 그의 말을 빌어서 대학교 강단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리큘럼의 일환으로는 충분히 논의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카데믹한 공간에서는 정통학문의 시금석 위에서 충분히 객관적으로 논의될 수 있고, 토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방통행에 가까운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것은 선동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을 검증과정 없이 대중들 앞에서 용감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일단 도올이 대중 앞에서 여러 종교와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포퓰리즘 문화의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슬픔이다.

도올의 가장 큰 잘못이자 실수는 그럼으로 인해 한 전문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처신이라 할 수 있다. 도올은 이런 처신을 중지해야 한다. 요한복음 강의를 그가 쓰고 안 쓰고는 그의 학문적 자유다. 그러나 그가 소위 양심을 가진 학자라면 이런 행위를 일체 금해야 한다. 대중은 이성적이기 보다 감성적인 면이 많아서 그의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곧 ‘로고스’로 보는 주장에 대해서

말씀은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성서학적으로 봤을 때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와 동의어적인 맥락에서 채택된 단어다.

‘지혜’를 뜻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이며, 단어의 의미는 ‘소피아’이지만 요한복음은 이를 ‘로고스’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로고스를 이성으로 번역하는 것은 단순무식한 해석이다.

즉, 구약성경의 번역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구약의 지혜서들을 보면 이 ‘지혜’는 인격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순수 이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고스, 이 단어 하나에 의지하여 말한 도올의 주장은 자신의 예수관을 이데올로기화한 해석으로 보인다. 즉, 그는 역사적 인간에 대해서 인격성을 의문시한 불트만(Rudolf Bultmann) 계열의 낡은 신학적 노선을 복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 폐기론에 대해서

그는 “구약폐기론을 주장하지 않았고, 다만 새 계약이 나오면 구 계약은 의미와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신학의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이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것은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의 말씀에서다. 이 말씀에 의거할 때 구약과 신약사이에는 연속성과 단절성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다. 거기서 구약은 돌판에 새겨진 법을 준수하는 것과 관계가 있고 신약은 그 법이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법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사건은 성만찬, 부활, 성령강림이라는 일련의 구원경륜적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신약은 구약에 대하여 분명한 단절성을 갖는 동시에 끊을 수 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법은 여전히 명맥은 유지하면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톨릭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도올은 수도 없는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개신교계의 교단현실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그리스도교의 교의에 트집을 잡으려는 의도에서 발견된다. 개신교계의 문제는 교의가 잘못되어서 자행되고 있다기 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잘못되고 있는 현상이다.

실천을 지적하려면 교의를 존중하는 가운데 지적하려는 예의, 즉 에티켓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톨릭이 직접적 비판대상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십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가 개신교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흔들어놓는 성경 해석의 방법론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뿌리에서 가톨릭의 신학을 함께 건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때문에 가톨릭은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그의 행동을 보면 그리스도교를 긍정적으로 비판한다는 명목 하에 자신의 우주관 내지 종교관을 홍보하려는 저의가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에서 너무도 많은 증오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많은 오류를 범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체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안의 일부 지도자들이 죄와 실수를 범하였다는 말이다. 이점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운 세상의 종교는 아무것도 없다.

잘못은 잘못이다. 이에 교회는 수없이 회개하면서 쇄신해 왔다. 역사의 종말까지 이 과정은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세력이 교회 안에 침투하여 훼방하는 일이 중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올이 범하는 논리적인 실수는 언제나 한 면만 보고 침소봉대 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용감한 폭로자가 아니라 비겁한 트집쟁이에 가깝다. 어둠과 빛을 동시에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양심가다.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서

애당초 도올은 요한복음을 강의할 자격이 없다. 그가 적어도 양심적 학자라 한다면 자신의 한 분야를 정해서 그 분야에만 충실해야 한다.

그는 착각하고 있다. 스스로가 대한민국에서 요한복음을 강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문가라고 말이다. 이것은 이 분야에 수십 년간 몰두했던 신학자들에 대한 무례며 절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간 소통은 경전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교종교학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범주의 오류에 대한 인정이다.

우주관과 세계관이 전혀 다른 여러 경전들을 비교해석 한다는 것은 아카데믹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시도다. 거기에는 많은 한계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통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식한 행위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검증된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주장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그런데 도올은 아직 가설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나 자신이 창출한 가설을 가지고 나와서 마치 그것이 학계의 정설인양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진지하고 냉철하고 겸허한 학문적인 태도가 아쉽다.

도올은 때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서 논의의 수위를 조정할 줄 알았던 예수에게서 배울 줄 알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제는 아직 토론과정에 있는 커리큘럼의 내용들을 무절제하게 대중에게 유포한다는 점이다. 대중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의 이해 수준을 고려한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람은 대중이 혼돈에 빠지든 타락하든 안중에 없다.

물론 도올의 말이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 가운데 맞는 말도 있고 귀담아 들어야할 주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계 전반의 냉철한 성찰과 쇄신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도올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과 노선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야에 겸손하게 몰입할 줄 알아야 한다.

학문은 교만한 천재보다 성실한 전문가들에 의해서 명맥을 이어왔다. 또한 학문은 역사 속에서 냉험한 검증과정을 거쳐 계승되는 자정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올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전문가 수준으로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행위고 성실치 못한 처사다.

비전문가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학문적인 깊이와 폭이 전문가에게는 있는 것이다. 도올이 진심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설령 자신이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전문가인 본인이 꼭 지적해야만 한다는 과대망상증을 버리고 그것을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유보할 줄 아는 도량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설령 전문가가 아직 부족한 식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만일 한 전문가의 견해와 한 똑똑한 비전문가의 견해가 상충한다 했을 때 전문가의 손을 들어줄 줄 아는 나라가 발전된 미래를 담보 받는다.

비전문가의 의견에 호도되는 나라는 망한다. 사회에는 서로 약정된 룰이 있는데 그가 그 룰을 지키면 우리는 그의 말을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번번이 룰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그를 믿을 수 있겠는가.

- 차동엽 신부

세례명 로베르토. 1981년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와 미국 보스턴 대학 등에서 수학했으며,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현재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겸 인천 가톨릭대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