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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뿌리를 돌볼 줄 아는 영으로 다시 읽는 “두 아들의 비유”

입력일 2007-03-04 수정일 200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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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토착화’를 꿈꾸며

성경이란 일차적으로 공동체의 품에서 토착화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청중을 고려하는 성서 읽기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마태오 공동체의 경우 이것은 특히 지난번에 보았듯이 민족적 정체성과 연계된다.

실제로 마태오는 자신의 민족적 뿌리를 돌볼 줄 아는 영으로 예수 사건을 해석한 예를 여럿 전한다. 저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 28~31)도 그중의 하나이다. 아버지가 맏이와 둘째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맏이는 싫다고 하고는 가서 일하였고, 둘째는 반대였다는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였다.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이들에게 답하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전한다.

그분은 이 이야기 끝에 누가 아버지의 뜻에 따랐는지 물으시고는 권위를 질문한 그들에게 그야말로 권위있게 선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여기서 대사제, 원로 그룹과 세리, 창녀 그룹이 서로 대비된다. 이들 중에 누가 장자로 표상되고 누가 둘째로 표상되겠는가?

현실 관계에서 볼 때 대사제와 원로들이 장자로 표상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하느님의 정통을 이어가는 존재라는 맏이 의식을 갖고 있었다. 또한 유다인과 비유다인, 유다계와 비유다계 사회의 관계에서도 유다인들 사이에 이같은 장자 정통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마태오 본문에서는 어떤가? 31절에서 예수께 단죄당한 부류인 대사제와 원로들이 장자로 표상될 것이 예상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장자가 처음에는 싫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다고 했다. 이를테면, 여기에서는 실제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대비 관계가 깨진 채 맏이가 회심하여 아버지 뜻을 실천(神行)한 존재로 나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을 정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이같은 어색함이 일찍부터 간파되었다. 그리하여 ‘바티칸 사본’처럼, 첫째와 둘째의 역할을 바꾸어서 둘째가 회심하였다고 한 사례들이 있었다.

여기서는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는가?” 하는 예수님 물음에 대사제와 원로들이 “막내”라고 답한다. 이 사본은 결국 유다 지도자들이 자신을 단죄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맥락에서는 31절의 예수의 단죄 선언이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면서, 예수가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준 본래 취지에 더 잘 부합한다.

그러면 마태오는 왜 이런 자연스러움을 뒤틀어서 맏이가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한 것으로 말했을까?

이것은 필경 마태오 복음서의 제1의 청중과 그의 민족적 정체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마태오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후예로서 나라의 패망을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다. 구세사에서 장자의 위치를 살아간다는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던 그들에게 큰아들의 실천적인 불순명을 비판하고 작은아들의 궁극적인 실천을 예찬하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뿌리에 등을 돌려야 하는 비애를 겪게 만들기가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반면에 마태오의 현재 본문을 깊게 만날 때, 저 돌아온 맏이 이야기(루카의 돌아온 작은 아들과 대비해 보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들에게 새롭게 가져다줄 위로와 희망과 감사를 이들의 가슴속에 피어오르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 제2 이사야가 유배지에 있던 유다인들에게 용서와 위로와 희망의 하느님을 고지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실로 마태오는 종교와 심리적으로 위압적이고 단죄로 작용할 수 있는 ‘바티칸 사본’ 양식을 자기의 청중에게 강요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청중과 함께 자기 공동체의 편에서 부적절한 이야기 형식과 그에 따른 자학적 의미 생성 과정을 주체적으로 극복해야 했고, 그 한 결과가 현재와 같은 본문 형태(‘시나이 사본’)로 귀착된 것이었으리라.

‘사랑과 위로와 희망의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유산을 예수 사건 해석에 통합시키고 공동체와 함께 그것을 살리는 길로 토착화시킬 줄 알았던 마태오 공동체의 영명(靈明)한 신학혼, 나는 이것을 찬양한다. 우리 역시 그분의 이야기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토착화시킬 그때를 꿈꾸면서.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