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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신앙 공동체의 토착화 산물로서 예수님 이야기

입력일 2007-02-25 수정일 200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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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를 읽거나 필사해 본 사람은 안다. 이 세 복음서에 동일한 혹은 유사한 소재를 다룬 대목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이런 현상은 마태오와 루카가 마르코 복음을 기초 자료로 사용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목들을 면밀하게 대조해 보면 전후 맥락은 물론, 어휘와 문장의 형태, 본문의 흐름과 구조 등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런 결과는 이 복음서 저자들이 성령의 역사에 순명하는 가운데 예수의 선포와 구원의 행업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와 연결지어 해석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이것은 곧, 복음서 각 권이 저자들의 청중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을 되살도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토착화의 한 결과였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마르코나 루카는 옛것을 새것에 대비시키면서 전자를 버려질 것이나 걸림돌로 인식한다.(마르 2, 21~22; 루카 5, 36~39) 그러나 마태오는 새것에 대한 마르코의 관심을 수용하면서도, 옛것 역시 보존하려는 분명한 관심을 드러낸다.(마태 9, 16~17)

이것은 단지 개인 취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유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이들이 속한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이런 점에서 복음서들은 그 각각의 공동체의 품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나 루카의 경우 팔레스티나 밖에 형성되어 있던 새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리고 마태오의 경우 유다계 그리스도 공동체가 일차적인 청중이었다. 마태오 공동체는 민족의 패망을 겪으면서 다른 민족들에 의하여 가해지는 정치, 사회, 종교적인 억압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동족과의 관계에서도 유대교에 의하여 박해받고 있었다.

다른 한편 이들은 이스라엘 밖에서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새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옛 공동체요, 장자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 이런 위치에서 마르코가 쓴 복음서를 기초로 삼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코가 한 것처럼 옛 것을 새 것을 담을 수 없는 무엇으로 말하고 말 수 있었을까?

예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자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새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묵은-옛-공동체의 위치에 있었고 민족의 패망이라는 시련을 겪고 있던 공동체에게 이 본문을 전하면서 똑같이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는 법”이라고 말하고 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묵은-옛 백성으로서 낡고 탄력을 잃은 채 패망의 고난을 겪고 있던 이들에게 저 ‘옛것’ 폐기 진술은 그야말로 최종 심판의 말로 작용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맥락에서 저 시련과 박해를 겪던 옛-묵은-공동체에게 마태오가 덧붙인 다음 진술의 절묘한 끌어안기를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때 마태오에 의하여 덧붙여진 저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는 말이 저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였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해묵었다는 자신들의 존재와 옛 가르침 역시 그리스도의 새 생명의 가르침에 의하여 존재할 이유를 새롭게 부여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고취하는 초대와도 같이 체험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우리는 이제 성경을 읽을 때, 각 복음서 저자가 자신의 공동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예수 사건을 전하였다는 점을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단지 예수 자신을 개인적으로 찬양하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예수의 생애 그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복음서를 저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 읽기 태도를 “청중을 고려한 성경 읽기”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극단적으로 청중 중심의 읽기에 경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이제는 보다 더 성숙한 방식으로 마태오가 쓴 예수 이야기의 제일의 청자들을 마태오의 본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소외시키지 않아야 하리라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서에 전해지는 예수 이야기는 본래 그 복음서가 쓰여진 공동체의 품에서 그리고 그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토착화된 예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