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주교님 이야기] 지혜의 삶’ 지금 시작하자

입력일 2007-01-01 수정일 200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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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든 죄를 나에게 다오”

저는 아침 자명종이 울리면 항상 조금만 더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습니다.

성호경을 그은 후에 “예수님, 당신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성모님, 당신께서는 왜 십자가 밑에 외로이 서 계셨습니까?”라는 기도를 바친 후에 그날의 계획된 일과 하루를 맡겨드리고 주모경을 바치며 새 아침을 여는 것이 사제 생활 시작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루의 첫 기도를 바치는 이유는 제가 만날 모든 고통-부정적인 일-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과, 십자가 밑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성모 마리아를 닮고 싶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특별히 한 해를 마감하는 끝자락에 예수님께 한 해를 셈 바쳐드리는 계산을 하면서 죄송스런 마음이 많이 듭니다. 드릴 것이 거의 없는 텅 빈 손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 예로니모(340~420) 성인이 체험한 하느님은 저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기 위하여 고향 로마를 떠나 예루살렘의 작은 동굴과 같은 집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예로니모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 다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로니모는 깜짝 놀라며 “예수님, 저는 당신을 따르기 위하여 부모와 친구, 정든 고향, 넉넉한 생활을 버리고 이곳에서 당신의 말씀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더 많은 이들이 당신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로니모야, 네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다 나에게 다오”라고 대답하시고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과거의 죄가 성덕으로 나아가는데 큰 방해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 선행, 의로운 행동을 좋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까지도 기쁘게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어 늘 새롭게 시작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물론 악은 우리에게서 힘과 용기를 빼고, 주저하고 멈추도록 유혹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의 말씀에서 오후 다섯 시에 포도밭에서 일하고도 하루의 품삯을 다 받은 것처럼, 금년 한 해의 모든 좋았던 점에 감사드리고, 부족하였던 점에 대하여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사전에는 지각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작하면 아직도 빠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한 해의 셈을 잘 바쳐드려서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 16)는 말씀의 주인공이 되는, 하느님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유흥식 주교(대전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