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이 시대 이 문화] 76(끝).다양성 안에서 일치

입력일 2006-12-24 수정일 200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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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하는 아름다움

지난 2년여 동안 가톨릭신문을 통해 게재된 특집 기획 ‘이 시대 이 문화’는 현대 사회와 문화 안에서 가톨릭의 영성적 접점을 찾아보려는 의욕적인 시도였다. 이 기획을 마감하면서 필자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말은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였다.

‘지구촌 한 가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물리적 공간은 축소됐고, 이에 따라 시간적인 거리 역시 단축됐다. 이렇게 압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주 시대’를 꿈꾸며 살게 된 오늘,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 소양은 무엇보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의 현실을 인식하며 살게 된 인류에게 다양성은 최대의 축복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갈등과 분쟁의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선 가족이라는 개념만 해도 그렇다. 가족이라고 하면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혈연, 가족간의 유대만은 확고부동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젠 분거 가족, 자발적인 무자녀, 한 부모, 재혼, 복합, 공동체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개별 가족의 상황이나 가치 지향에 따라 출현하고 있고 그 수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근래엔 국제결혼, 탈북자들이 늘어나면서 ‘코시안’, ‘새터민’ 등의 신조어도 생겨났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서 ‘다문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대안 가족’, ‘열린 가족’ 등의 논의가 많아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바로 나의 가정이 ‘다문화 가족’이라고 불릴 만큼, 우리 안에 이미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내 자신 안에서조차 다양성이라고 하는 시대적 특징이 응축돼 있다.

세계의 십대들이 열광하는 음악이나 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만의 언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성 세대로서는 결코 이성적으로는 물론 감정적으로도 결코 공감이 쉽지 않은 그들의 음악과 몸짓, 언어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순간, 신앙의 언어가 연령이나 지역, 국가의 차이를 넘어서 훨씬 강한 유대감으로 작용하게 되고, 또 다른 경우엔 다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얼마든지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한 사람 안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서 다양성은 지구촌 전역에 걸쳐 무수한 차이와 다름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처럼 전혀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은 다양성의 세계 안에서도,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나름의 일치를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또 실제로 구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문득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창조주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간에-의 마음으로 세상만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교식으로 관(觀), 혹은 관조(觀照), 그리스도교 식으로 관상적 안목이라고 할까?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다양성을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어낸다. 하나의 빛에서 반사된 무지개 빛깔은 저마다의 색을 간직하면서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다양성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창조주의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해 주고 보듬어 줄 때 서로 간의 일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 마음 안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갈망이야말로 일치를 향한 절실한 이 시대의 영성이라 생각한다.

최혜영 (가톨릭대 문화영성 대학원)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과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기획, 2년여간 연재된 ‘이 시대 이 문화’가 이번 호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 동안 집필해주신 문화영성대학원의 모든 필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