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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8.수도회 창설자편 (3)가르멜산 은수자들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6-12-17 수정일 200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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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산에 있는 엘리야의 우물(왼쪽아래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고행, 가난 통해 하느님과 일치 꿈꿔

13c 은수자들이 ‘엘리야 우물’ 근처 살며 시작

맨발의 가르멜회 등 봉쇄, 활동 수도회로 구분

관상수도회를 일컬을 때 항상 그 맨 앞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가르멜회이다. 여타의 수도회들이 일정한 창설자에 의해 시작되고 그 창설자의 정신과 영성을 본받아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가르멜회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로부터 시작된 가르멜회는 봉쇄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로 구분되는데 봉쇄 수도회 중에서도 ‘맨발의 가르멜회’(Ordo Camelitarum Discalceatorum)는 O.C.D.라는 약칭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OCarm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이미 13세기부터 여성들이 이 수도회 규칙에 따라 서원을 한 사례가 보이지만 가르멜 수녀회는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인준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됐다.

현재 전세계의 가르멜회 회원들은 남자가 3700여명, 여자가 10만 5000여명이고 이 중 한국에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그리고 가르멜 전교 수녀회 등이 있으며 재속회로 가르멜 제3회가 있다.

엘리야가 기도했던 가르멜산

12세기 말경 제1차 십자군 원정 후 일단의 유럽인들이 팔레스티나 북부 갈릴레아에 있는 가르멜산에 정착한다. 이들은 13세기 초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있는 작은 암자들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고, 그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인근 성녀 마르가리타 수도원의 희랍 수도승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 가르멜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 곧 이스라엘의 하이파 동남쪽에 있는 거룩한 산이다.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는 언제나 가르멜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도 이렇게 믿고 있었고, 1281년 회헌 서두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가르멜산에서 경건히 생활하던 때부터 구약과 신약의 성조들은 엘리야의 우물 곁에서 거룩한 계승을 부단히 지속하며 칭송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약 570여 년경이었고 후대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던 알베르토(1205~1210)는 1206년에서 1214년 사이에 은수자들의 요청에 따라 은수자들 자신이 제시한 제안에 적합한 하나의 생활 규범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이 규칙서에 따르면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의 통솔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바로 이것이 수도회 설립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13세기에 팔레스티나 최북단 항구인 아코(Akko)의 주교였던 드비트뤼도 팔레스티나에 라틴 왕국이 설립된 12세기에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가르멜산에 정착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 규칙은 원장의 선출과 함께 시작돼 순종 아래 각 수도자에게 개인 숙소가 배당되며 거기서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머물러야 한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중단 없는 개인기도이고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전례기도가 개인기도에 부가된다. 규칙서는 은수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통합을 제시한다.

1226년 교황 호노리노 3세는 이 규칙을 승인한다. 이로써 초기의 규범은 참된 규칙이 되었는데, 1229년 그레고리오 9세는 가르멜 은수자들을 탁발 수도회들의 생활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하면서 가르멜 회원들에게 탁발 혹은 공동체적 가난을 부과했다.

탁발수도회로 인정 받아

은수자들은 1235년 서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회교도들의 탄압에 의해 서방으로 옮아간 수도회는 13세기말까지 150여개의 수도원이 12개 관구로 나뉘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15세기까지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과 포르투갈 등지까지 수도회가 확산됐다.

서방으로의 이전과 탁발의 부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수도회는 이제 은수적이고 관상적인 수도회에서 탁발수도회로 옮아가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상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가르멜회의 영성은 이제 관상과 활동간에 균형을 잡아나가게 되며 이 오묘한 두 축은 가르멜회 영성의 발전 안에서 중심축을 이뤄 왔다.

1274년 리용 공의회에서 탁발 수도회로서의 성격을 잠정적으로 인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1298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와 동일하게 탁발 수도회로서의 특전과 면제를 부여했다.

1317년 요한 22세 때 탁발 수도회를 향한 가르멜회의 발전 과정을 종결됐다고 할 수 있다. 즉 가르멜 회원들은 항상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수도회의 주된 목표, 즉 공동체 전례 기도에 밀접히 연결된 관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 종속시키면서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가르멜회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마리아 신심은 이 수도회의 상징이 됐다.

14세기에 들어와서 서방 교회의 분열과 함께 가르멜회도 지역에 따라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개혁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온 가르멜회는 쇠퇴와 부흥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