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7.수도회 창설자편 (2)라살 신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6-12-10 수정일 2006-12-10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교육 혁신과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한 라살은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교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수도회 주축으로 ‘교육 혁신’ 주도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 창설… 교사들의 주보

가난한 이들의 ‘교육 기회’ 마련에 일생 바쳐

라살(세례자 요한, La Salle, Jean-Baptiste de, 1651~1719)은 교회 뿐만 아니라 서구의 교육사 안에서도 그 기여와 공헌이 빼어난 교육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종종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the Christian Brothers)로 불리우는 ‘그리스도교 교육 형제회’(the Institute of the Brothers of the Christian Schools)의 창설자로서 당대의 교육 풍토를 혁신한 개혁가이며 현대 교리교육의 아버지이다.

자선학교서 교육 전망 찾아

1651년 4월 30일 프랑스 랭스(Reims)에서 부유한 고대 왕가 귀족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놀라운 신심을 보인 그는 11세때 사제 수업에 들어가 16세에 랭스 주교좌 성당 참사회원이 됐으며, 27세에 사제품을 받았다.

잘 생긴 외모에 풍요로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평생을 헌신해야 할 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 사업임을 깨닫는다. 비록 평생을 바쳐 일해야 하는 그 길은 험한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의심 없이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17세기 프랑스의 사회 질서는 여전히 과거의 관습에 매여 있었다. 교육과 관련해 모든 교육 혜택은 부유한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대다수 민중들을 위한 이상적인 교육에는 전혀 관심도 배려도 없었다.

라살은 이러한 극단적인 무관심을 개탄했고, 이를 타파해 가난한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하는 것은 평생의 과제였다. 라살이 교육에 몸담기 시작한 처음부터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제품을 받은 뒤 첫 임지는 한 수녀회의 영적 지도 신부였고 그 수녀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친척 중 하나이기도 한 부유한 여성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에게 고아 소년들을 위한 시설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에 아리앙 니겔이라는 한 평신도 교사가 합류하게 되고 성공적으로 시설을 운영함에 따라 곧 교구내의 여러 곳에 유사한 시설들이 세워졌고 이곳들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이뤄졌다.

라살은 이러한 자선학교들에서 자신의 교육적 전망을 찾았지만, 문제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집하고 받아들인 교사들과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엄격한 수련 생활을 따르도록 권유하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들을 모색해나갔다. 보수도 없고 너무나 고되고 힘든 일 때문에 몇몇 교사들은 이 자리를 포기하고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좋은 젊은이들이 이 일을 자청해주었다.

최초의 정규 학교 설립

그러나 라살은 양질의 교사들을 교육하고 훈련시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올바른 교육을 받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학교 설립보다도 오히려 그들에게 종교심을 키우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했고 이를 위해서 양질의 교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바로 이를 위해서 그는 수도 단체 설립을 통해서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1684년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해 12명의 학교 교사들과 함께 1년 동안의 수련기를 거쳐 독특한 수도복의 수도회를 창립하게 된다. 바로 이 수도단체가 ‘그리스도교 교육 형제회’이다.

1686년에 최초의 정규 학교를 랭스에 설립한 그는 파리에 두 번째 학교를 세웠다. 1688년 파리로 수도회 본부를 옮긴 후 교구 소속을 거부했으며 6년 뒤에는 12명의 형제들이 라살의 단체에 거주하면서 또 다른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라살은 1700년부터 여러 곳에 학교 문을 열었고 채 몇 년이 안되어 남부 프랑스 지역으로까지 학교를 확장했다.

수도회는 파리에서는 최초의 정규 보통학교를 설립했고 나아가 성인들을 위한 수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교육을 확장했고 루앙에서는 중류 사회 상인들의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도 열었다. 1705년에 수도회는 다시 본부를 파리에서 루앙으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또 다른 기관을 설립한다.

라살의 교육 혁신은 당대의 여러 기득권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얀센주의의 반대는 큰 장애요 골칫거리였다. 당시 프랑스에 널리 퍼져 적지 않은 주교와 성직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얀센주의는 그가 극복해야 할 큰 장애였다.

라살의 교육 개혁은 몇 가지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그의 교육 방법은 그의 회칙 안에 기초되어 있는데 1720년에 출판된 ‘학교들의 지침서’(The Conduct of Schools)에서 그는 이론이 아니라 엄격하게 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특별히 라틴어 대신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함으로써 선구자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했다.

1719년 루앙에서 세상을 떠난 그는 1900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시성됐고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그를 교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다. 라살과 그의 수도회는 우리에게 교육의 가치를 새롭게 환기시킨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