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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4.사회운동가 및 제 3 세계(10)아데나워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6-11-05 수정일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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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는 1954년 유럽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샤를마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대전 후 ‘유럽통합’ 이끈 지도자

서독 초대 총리…경제부흥-국가간 연대 이뤄

프랑스 드골과 함께 유럽연합(EU) 설립 주역

독일 사람들은 ‘아데나워’를 가리켜 ‘독일 연방공화국 건국의 국부’라고 한다. 또 브란트, 슈미트와 더불어 현대 독일의 빼어난 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칭하고 있다.

독일 뿐 아니라 전 유럽을 통틀어 오늘날까지도 아데나워의 업적이 존경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형제애와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1, 2차 세계대전의 폐해로 얼룩져 있던 유럽을 통합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비록 당시 화해와 통합의 여정에서 분단국이었던 동독과 소련의 참여는 이뤄질 수 없었지만 강력한 리더쉽과 정치수완을 통한 아데나워의 노력은 유럽의 평화 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 받는다.

콘라드 아데나워(Adenauer, Konrad, 1876~1967)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서독의 초대 총리로 재임한 인물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잿더미에 빠진 독일을 재건해 세계무대에 당당히 등장시킨 인물이다.

파란만장한 정치인생

1876년 가난한 공무원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데나워는 프라이부르크, 뮌헨, 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후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1917년 프로이센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계에 첫발을 디딘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그는 모든 공식적인 지위를 상실했으며 1944년 히틀러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투옥됐다.

1945년 6월 미국에 의해서 쾰른 시장에 복직하였으나, 10월 영국 정부와 대립, 시장직을 사임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보냈다. 아데나워가 전후 독일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그해부터다.

그는 기독민주당(CDU) 창당에 참가해 당수가 되었고, 1949년 국회의원 당선에 이어 그해 9월 15일 연방의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았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그는 1963년 10월, 88세에 총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전후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룩했고, 독·프 우호, 서유럽 연합, 대미협력 등의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기본은 ‘인간의 자연권’

아데나워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과 함께 지금의 유럽연합(EU)을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그는 라인강 변에 세운 독일공화국을 평화 우호적인 문민정치의 새 나라임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프랑스와의 화해를 서독외교의 제1 우선순위로 뒀다.

나아가 스스로 발의, 주창해 서유럽경제공동체(EEC)를 설립시켰다. 프랑스 랭스 대성당에서 독·불 우호조약을 체결한 후 아데나워와 드골의 포옹은 그의 서방정책의 한 정점을 상징하는 광경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아데나워의 노력을 가능케 했던 요인의 하나는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형제애와 연대정신, 즉 이웃사랑이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프랑스와 독일을 그리스도교적인 연대로 풀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아데나워는 그리스도교적 유럽 또는 그리스도교적 서양이라는 표현을 초교파적인 의미에서 사용했다. 그가 초대 당수를 맡았던 기독민주당이 독일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정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당연하다.

한편으로 아데나워의 시각에서 그리스도교적인 것의 핵심은 개인의 자연권이었다. 이 개인의 자연권 사상은 전후 독일의 양대 정치세력(사회민주당과 기독민주당)에 의해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공통분모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아데나워의 그리스도교적 유럽이란 초 교파적이며 인간의 자연권에 기초한 것이다. 되링-만토이펠은 아데나워의 그리스도교적 유럽을 시민적 기본권이 보장된 시민적 유럽이라고 재 정의하고 있다.

국민 위해 헌신한 정치인

아데나워는 유럽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54년 샤를마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샤를마뉴상은 신성로마제국 옛 수도인 독일 아헨 지역 출신 기업인 쿠르트 파이퍼가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샤를마뉴를 기려 1949년 제정한 상으로 1950년부터 매년 유럽 일치에 공헌한 지도자들에게 수여돼 왔다.

아데나워는 초대 독일 수상 선거에서 자기 투표지에 자기 이름을 써 넣어 사회민주당의 후보를 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는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정치목적을 이뤘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일화에서 그가 얼마나 국민들을 위한 삶에 헌신했는지 엿볼 수 있다.

1932년 2월 쾰른시장으로 있을 당시 히틀러가 집권을 위해 쾰른시에 방문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시민들의 환대를 요구하는 히틀러에게 아데나워는 무리한 요구라며 거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2년간 추방을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 다른 일화 하나.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쾰른을 장악한 영국 사령관은 그에게 난방연료를 위해 인근의 나무를 베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아데나워는 “영국인은 나무를 함부로 베는 모양이지만 독일인은 그럴 수 없다. 루르지방까지 가면 탄광이 많은데 점령군 사령관이 수송을 맡으면 된다”고 거부하며 사표까지 제출했다.

아데나워가 보여준 강자를 향한 용기와 국민들을 위한 헌신의 모습은 걸핏하면 삿대질에 고함과 욕설이 오가는 우리나라 국회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