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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이 문화] 70.죽음

입력일 2006-10-29 수정일 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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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고 있다. 다양한 장례문화를 모색하기도 하고, 짧은 순간 죽음의 상태에 이르렀다 되살아난 사람들의 경험 이야기가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한다. 종교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의학자 등이 모여 ‘죽음학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잘 죽는다’는 것

몇 년 전부터 ‘웰빙(well-being)’이 엄청난 붐을 일으키고 있는데, 죽음에 대한 관심 역시 웰빙의 연장선상에서 의미를 지닌다. 웰빙은 말 그대로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삶은 결국 ‘잘 죽는 것’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환경의 삶을 살았다한들 삶의 마지막 단계인 죽음의 순간을 구차하게 맞이한다면 결코 ‘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장렬한 죽음, 호사로운 장례절차를 받는 죽음 등이 결코 잘 죽는 것은 아닐 것이고, 결국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상태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세상과 삶에 집착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수용하면서 지나온 삶 전체를 잔잔히 매듭지을 수 있을 때 정말 ‘잘 죽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가피하게 부여받는 운명이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양과 질의 삶을 살아갈지에 관한 운명은 수많은 인간들이 각양각색으로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종국에는 이 삶을 끝내야만 한다는 운명은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다.

인간은 죽음이 자신에게 친숙했던 삶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그 퇴장을 별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싫어한다. 더욱이 인간은 삶의 끝을 의미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고대인이나 첨단 과학문명으로 무장한 현대인이나 죽음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존재이다.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최소한 그것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확실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존재의 필연적 과정

죽음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여러 종교전통들 안에 체계적인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지닌다. 먼저 죽음을 심각한 현실로서 받아들인다. 결코 죽음이라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문제의 심각성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이 주는 표면적인 공포감에 그대로 압도당하지는 않는다. 인간 삶의 전체 여정에서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그만큼의 필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한다.

죽음이라는 운명은 인간 존재의 현세적인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이 같은 현세적 제한성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인 완성의 존재를 추구하는 종교적 인간은 죽음이야말로 궁극적인 완성에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세적인 탄생에 의해 부여된 불완전한 존재가 반드시 죽어야만 완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음은 단순한 무화(無化)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참 생명, 보다 본질적인 존재로 옮겨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참 생명을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것으로 설명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의 승화를 가능하게 하는 신앙의 근거를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각 종교전통들이 다름을 보이지만,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자신의 종교적 이상이 실현되는 계기로서 승화시키는 구조에 있어서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지섭(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