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마르코복음서(40)

입력일 2006-10-15 수정일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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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들 위선적 태도 비판하며

자기 전부 내놓은 과부 선행 칭찬

다윗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마르 12, 35~37)

메시아(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아들)에 대한 논의가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35절)

앞서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고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주신다. 예수님의 논지는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우월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분을 ‘다윗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시다.(2사무 7, 12~14; 이사 11, 1; 예레 23, 5; 에제 34, 23; 37, 24) 그러나 예수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 이상이시다. ‘다윗의 자손(아들)’이라는 존칭은 이승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는 그런대로 알맞지만 부활하여 성부께로 가신 예수님을 가리키기에는 불충분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학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한 시편의 노래를 상기시킨다.(시편 110, 1)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36절)

이는 시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왕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메시아가 하느님의 오른쪽에 좌정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정체가 확인된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시다.(사도 2, 33~36; 로마 1, 3~4절)

율법 학자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12, 38~40)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시며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어찌나 구체적이고 신랄한지 도무지 피해갈 여지가 없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39절)

혹시 우리의 처지가 이런 모양새는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기도를 하거나 판결을 내릴 때 긴 예복을 입었는데 경건해 보이려고 다른 사람보다 성구갑도 넓게 만들고 옷단의 술도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한다.(마태 23, 5) 옷매무새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딴 데 있으니 안팎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기보다 그들에게 대접받으려는 그들의 명예욕이 훤히 드러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40절)

과부는 가난한 이를 대표한다. 지도자들이 가난한 이를 돌보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행위가 된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체 기도만 길게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태도가 거짓 신앙인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큰 만큼 그들에 대한 단죄 또한 엄중할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12, 41~44)

예수님께서 군중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양을 보고 계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그녀의 선행을 칭찬하신다.

렙톤은 그리스 돈 가운데 최소단위 동전으로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 구역’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헌금함 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헌금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분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43~44절)

가난한 과부의 관대한 마음이 앞서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크게 대조를 보인다. 가난한 과부의 선행이 제자들을 위한 특수교육으로 제시되는 것은 그녀가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는 계명을 누구보다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제자 됨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추종은 어떤 보상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