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4(끝).전북 완주 고산본당 되재공소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09-24 수정일 200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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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재공소 옛 교우촌을 지키고 있는 김영옥 공소회장(왼쪽)과 이학선씨가 옛날 프랑스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의 십자가를 보이고 있다. ?되재공소 김영옥 공소회장과 최고령 이학선씨가 되재성당을 복원할 터를 가리키고 있다. 이들은 “하루빨리 공소가 복원돼 많은 신자들?
화려했던 ‘신앙의 땅’엔 정적만이…

한때 400명 신자들 함께 모여 매일 기도

이명서 등 지역 출신 순교자만 100여명

빛 바랜 흑백사진 한 장. 그 안에는 기와로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이 있다. 한복 입은 남녀노소 사람들이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전주교구 고산본당(주임 이태주 신부) 되재공소. 1896년 축복식을 가졌다고 하니까 올해로 정확히 110년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 소실됐기 때문이다. 공소건물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한때 4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침 저녁으로 모여 함께 기도했다는 그 화려했던 신앙의 땅에는 이제 노인 몇명만 남아 외롭게 신앙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되재 공소 최고령 이학선(마르코?79)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만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마을 신자들이 모여 기도를 바칠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신앙심이 대단했다”며 “새벽미사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가 부모님께 회초리를 맞았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할아버지에게 곰방대로 맞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4대째 되재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김영옥(비오?68) 공소회장도 “전기가 마을에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에 의지해 함께 기도를 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며 “예전 교우촌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잠시 후 오래된 노트 한권을 꺼내 보였다. 노트에는 되재공소의 과거가 있었다.

“이 성당은 400여명의 교우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큽니다. 주일마다 거의 가득차고 축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문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미사 성제의 참례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고 태도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중략)평일미사 참례도 더 이상 나무랄 데 없으며, 신자들 대다수가 매일 성체 조배를 하려고 합니다.”

1895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비에모 신부의 기록은 되재가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비에모 신부는 주일미사에 400여명의 신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들었다고 기록에 남겼다.

이 지역에 이렇게 많은 신앙인들이 어떻게 함께 모여 살게 되었을까.

되재가 위치한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는 산과 골짜기가 많아 박해시대 당시 전국 각처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 일대 교우촌이 넓은바위, 천호, 차돌박이, 석장리, 되재 등 무려 50여곳이나 됐다고 한다.

교우촌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했고, 순교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현재 천호성지에 안장돼 있는 이명서(베드로) 손선지(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한재권(요셉) 등 순교성인 4위와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명이 이 지역 출신이다.

하지만 고난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생기자 되재에 성당이 세워진 것. 1895년에 완공되고 이듬해인 1896년 뮈텔 주교에 의해 축복식을 가졌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현 중림동)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단층 5칸 되재성당은 우리나라 첫 한옥 성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2004년 7월 전라북도 문화재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고산본당과 되재공소 신앙인들은 이제 그 흐릿해져 가는 신앙의 끄트머리를 붙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6년에는 신앙 역사에 반해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위해 40여명 수용 규모의 피정의 집을 지었다. 되재본당 설립 이전에 이 지역에서 사목한 조스 신부(1851~1886)와 라푸르카드 신부(1860~1888)의 묘소도 깨끗하게 단장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내에 되재성당도 원형대로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외롭게 교우촌을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70~80대 신앙인들만으로는 힘이 부친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다시 그 신앙의 역사를 다시 되살려야지요.”

김영옥 공소회장은 “과거에는 한집 식구가 9~11명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노부부만 외롭게 살고 있다”며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할아버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켜낸 신앙의 땅이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되재공소 순례문의 : 고산본당 063-263-4019

되재교우촌의 복음화 노력

되재본당은 1906년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신성학교(晨星學校)를 설립, 신자와 지역 주민들을 가르쳤다.

2년 후인 1908년에는 신성학교를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로 바꾸고 학제도 4년제로 개편했다. 한글, 한문, 산수, 화학, 물리, 지리, 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낮에는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농사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성인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태극계명학교는 경제난으로 1940년 폐교했다.

되재본당은 또 1908년 태극계명 측량강습소(太極啓明 測量講習所)를 설립, 측량 기술자를 양성했다.

가난하게 살던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자립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설립했지만, 일본의 토지 침탈로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기는 일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되재지역 신자와 주민들의 수가 점차 줄었고, 학교도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