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사라져가는 교우촌을 찾아서] 3.원머리·매산리 교우촌(충남 당진)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09-17 수정일 20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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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째 신앙 전통...나 죽고나면 누가…

“예전엔 하루 일과가 곧 신앙이었지

요즘 사람들 열심이 예전같지 않아”

“신앙 교우촌의 전통도 이제 내가 죽으면 끊어지겠지요.”

최정식(다태오.49)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5대째 내려온 신앙. 하지만 이젠 그 전통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

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거리. 순교자 성월을 맞아 찾아간 충남 당진군 신평본당 원머리·매산리 교우촌에는 과거 화려했던‘신앙 영화(榮華)’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때 500가구 이상이 살며, 매일 함께 기도하며 신앙을 실천했던 곳. 하지만 이제는 이농현상과 노령화의 영향으로 70~80대 노인들만이 남아 마지막 그 신앙의 끝자락을 지키고 있었다.

“젊은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혹시 있더라도 과거처럼 그렇게 열심한 신앙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매산리 교우촌 정희영(라우렌시오.72)씨는 “과거에는 매일 일을 마치면 공소에 모여 함께 저녁기도를 바치는 등 하루 일과 자체가 곧 신앙이었다”고 회고했다.

원머리 교우촌 이인성(베드로.84)씨도 “과거에는 신부님이 계시지 않아도 신자들 스스로 참으로 기쁜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제는 신부님께서 상주하시는 그 축복 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과거에는 주일미사 한번 하는 것도 소원일 정도로 신자들이 열심이었는데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평일미사도 잘 참례하지 않는다”며 “세월이 열심한 신앙도 함께 싣고 흘러가 버렸다”고 말했다.

정희영 이인성 두 노인은 긴 한숨 뒤, 신평본당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대 때부터 이어오는 이야기라고 했다.

충청남도 관문인 삽교천을 지척에 두고 있는 이곳에 교우촌들이 형성된 것은 180여년전. 1801년 이후 박해가 곳곳에서 발생하자 서울과 수원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앙인들이 현 신평본당 관할구역인 원머리(현 한정리)와 매산리로 이주해 왔다.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염전을 개척하여 그러저럭 평온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868년 가을, 수원 포졸들이 신자들을 체포하려 신평 일대에 들이닥친 것. 그들은 벼 타작을 하던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를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 이들은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 마르코는 33세, 박 마티아는 50세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원머리에 안장되었는데, 1989년 4월 4일 현 신평성당내로 이장됐고, 신평본당은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했다.

관아에 잡혀가지 않고, 살아남은 교우들은 그들대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먹을 식량이 수시로 떨어져 간신히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함께 먹을 것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그렇게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교우촌의 힘은 컸다. 대전교구 박재만 신부를 비롯해 최효인, 최상순 신부 등 많은 신부들이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곳 출신 수도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정희영 할아버지의 딸도 수도자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교우촌에 빚을 지고 있는 사실은 원머리와 매산리 교우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교우촌의 영화는 찾기 힘들다. 교우촌의 힘이 쇄력하면서 쉬는 신자도 늘고 있다. 도시 개발을 앞두고 있는 요즘에는 인심까지 흉흉해 지고 있다는 소문이다.

한때 수많은 이들이 모여앉아 공소예절을 바치고 기도를 했던 그 공소도 이제는 스산함만이 감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 정도만 열릴 뿐이다. 본당에서 매일 봉헌되는 미사에도 참례하는 이들이 줄었다. 외부 유입인구는 없고, 젊은이들은 밖으로 나가고…. 두 노인의 입에서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이 나왔다.

교우촌의 막내 최정식(49세)씨가 질문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 교우촌의 정신을 다시 살릴 길은 없을까요?”

※박 마르코 박 마티아 순교 묘역 순례 문의 : 신평본당 041-363-6761

◎신평성당 순교자 현양비 비문(全文)

순교자 박선진(말구)과 박마지아는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이다.

원머리에는 박해시대인 18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박말구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외교인들의 방해로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868(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혔으며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말구는 33세였고, 박마지아는 50세였다.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내로 이장하였으며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하였다.

박말구가 수원으로 잡혀갈 때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면서“천주님의 뜻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또한 박마지아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할 뜻을 비치자 “주님을 배반하고 영원한 지옥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쳐 함께 순교하니 그 믿음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될 것이기에 여기 현양비를 세워 그 높은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2000년 11월 21일

천주교 신평교회 신자 일동

사진설명

▶신평성당내 순교자 묘역을 찾은 순례객들이 참배 후 묘지 옆에서 순교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매산리 교우촌에 있는 옛 성직자 숙소. 사제들은 교우촌을 방문하면 3~4일씩 머물며 성사를 베풀었다.

▶원머리공소 건물 전경.

▶신평성당내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 묘역 옆에 세워진 순교자 현양비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