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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촌 영성] ②교우촌의 형성과 발전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09-10 수정일 200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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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바람 타고 퍼진 ‘신앙 꽃씨’

교우촌 밀집지역 미래 본당 공소터로 발전

공소회장, 전교 이끌며 평신도 사도직 실천

교우촌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무도 살지 않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세운 ‘신자들만 사는 마을’‘신자들만의 신앙 생활 공동체’를 말한다.

그럼 언제부터 이런 독특한 형태의 신앙 공동체가 생겨나고 발전했을까.

교회사 전문가들은 박해가 전국적인 양상을 띠는 1801년(신유박해) 전후를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그 해 전국은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진다.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와 서교(西敎)를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리고 가혹한 박해를 시작했다(많은 사학자들이 신유박해의 원인이 당시 복잡한 정치적 이유에서 연유한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신자 100여명이 순교하고(일부 자료에서는 순교자가 1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함) 약 400명이 유배된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된 것도 이 때다.

신자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자연스레 신자들만 모여 사는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함께 살고, 함께 기도’했다.

다른 경로로 교우촌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산 것이 아니라, 한 신자가 산골 마을에 들어간 후 그 마을 전체를 복음화하는 일도 있었다. 처음부터 신자들이 함께 모여 산 교우촌과 달리 이런 교우촌은 훗날 배교자의 밀고로 인해 마을 신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특이할 점은 박해가 없었다면 교우촌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고, 교우촌이 없었다면 전국 각지에 신앙이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신유박해 이전, 당시 가톨릭 신앙은 몇몇 지역에 한정돼 있었으나, 박해 후 교우촌이 전국에 생겨나면서 가톨릭 신앙이 자연스레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박해가 한국의 까따꼼바, 교우촌 등을 만들었고 그 교우촌이 신앙 전파의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럼 이 교우촌의 수는 얼마나 됐을까. 현재로선 교우촌의 정확한 수와 지역적 분포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교우촌 자체가 ‘숨어서 살았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교우촌이 존재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전주교구 진안본당 105년사’를 보면, 1800년대 후반, 진안지역에만 약 40여 개의 교우촌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중 100명 이상이 함께 모여 산 공동체가 10여 곳으로 당시 교우촌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교우촌이 밀집한 지역은 훗날 본당 설립 및 공소 설립으로 이어진다. 갓등이(현 왕림본당), 풍수원, 용소막 등 오랜 역사를 지난 본당들이 대부분 교우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교우촌을 한국교회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교우촌의 발전에는 공소회장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회장은 외국에서는 없는 개념으로, 라틴어에도 그 단어가 없다. 카테키스타(Catechista, 교리교사)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회장의 광범위한 역할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만큼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회장직분 및 그 영성은 한국교회 고유의 개념으로,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회장은 교리를 가르치고 대세를 베풀고, 전례를 이끌고, 교회법원 재판관의 역할도 했다. 또 선교활동에 앞장서고 신자 재교육을 주관하는 등 사제가 없는 상황에서 평신도 사도직의 실천과 실현을 전두지휘 했다. 훗날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들을 반기고 그 활동을 지원한 것 역시 교우촌이었고, 회장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의 터, 이들의 삶의 양식은 서서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