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6】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수원가톨릭대학교
입력일 2006-03-12 수정일 2006-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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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사순시기를 맞아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은 매 끼니마다 이웃을 위한 한 줌의 쌀을 모으는 모습.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활동하고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지상 장막의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도는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권고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죽음의 복됨’(De bono mortis) 3장 9절

[해설]

암브로시우스(339∼397)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에 속한다. 그의 생애에 관해 좀 더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죽음의 복됨’은 죽음에 관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강론이다. 불행하게도 이 강론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암브로시우스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가톨릭 신학에 정통함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의 복됨’에서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을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죽음. 둘째, 신비적인 죽음. 셋째,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은 죄이며 육적인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앙인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우리 인간 세계에 들어옴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죽음의 복됨’ 3, 9)

암브로시우스 교부에 의하면,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려면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을 본받는 것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깨뜨리는 것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본받는 삶을 죽음이 작용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삶에 작용하는 죽음을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비적인 죽음으로 간주하며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죽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은 삶의 가치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지혜를 찾고 있다. 현실 속의 불의를 외면하고 삶을 압박하는 멍에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부활의 희망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죽음을 본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외면한고 있다면, 먼저 신비적인 죽음이 작용할 영적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비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원히 남게 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참조: ‘죽음의 복됨’ 3, 9) 결국 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 아직도 사순시기가 그저 습관적인 전례의 일부분으로만 다가온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신비적인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 부활에로 다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을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 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에서 평온에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죽음의 복됨’ 3, 9)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해보자!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수원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