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2】순결한 창녀인 교회-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에우트로피우스 강해’에서

최원오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주교회의 사무국장
입력일 2006-02-12 수정일 200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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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늘 정화되고 새로워진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창녀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주는 예수님.
“죄와 허물까지 있는 그대로 사랑”

[본문]

그리스도께서는 창녀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그 창녀가 높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그분께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창녀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여인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떻게 들어가셨습니까? 벌거벗은 그 여인의 신적인 상태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창녀의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창녀가 그분을 뵙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도망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에 사로잡혀 짐승처럼 되어버린 상처투성이의 여인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창녀를 맞아들이십니다. 정말 그 창녀를 아내로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반지를 주십니다. 성령의 반지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그대를 내 안에 품어, 그 누구도 감히 그대를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오! 목자가 그대를 품에 안고 간다면, 늑대가 다가오지 못할 것이오.” 그러나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오나, 저는 죄인이며 더러운 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의사입니다.”

나의 벗들인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창녀를 당신의 아내로 맞으러 오셨습니다. 제가 창녀를 더러운 년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분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미친 사랑을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미친 사랑은 죄를 기워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허물과 부족함을 용서해 주십니다. 마귀의 딸이며 지상의 부당하기 짝이 없는 딸이 임금의 딸이 되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그 연인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그 연인께서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추한 것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미친 짓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종종 추한 것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처럼 하셨습니다. 추한 여인을 보시고, 미치도록 사랑하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녀를 아내로 삼으시고, 당신 딸처럼 사랑하시고, 여종처럼 돌보시고, 동정녀처럼 지켜주시고, 정원처럼 담을 둘러주시고, 당신 지체처럼 아끼시며, 당신 머리처럼 돌보시고, 뿌리처럼 심어주십니다. 목자처럼 그 여인을 보살피시고, 신랑처럼 그 창녀를 아내로 맞으시며, 제단처럼 그 여인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을 아름답게 지켜주시며, 신랑처럼 그 여인의 안녕을 염려합니다. 오, 추한 신부를 아름답게 만드시는 신랑이시여!

에우트로피우스 강해 2장 11절

[해설]

예수님께서 걸림돌(skandalon)이며 동시에 반석(petros)인 베드로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이 교회는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오류와 죄악을 저질러 왔지만,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아 교회는 늘 정화되고 새로워진다. 교회를 영원히 새롭게 하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용서이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른바 ‘거룩하고 완전한 교회’만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끔찍스러운 인간의 교만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랑이다. 흘러넘치는 사랑이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거룩하고 완전한 분이 부족하고 죄 많은 존재에게 내려오시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 스스로를 낮추어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사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교회는 종종 교회 자체의 완전함과 거룩함, 교회 구성원의 거룩함만을 강조함으로써, 부족하고 죄스런 교회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알아 뵙지 못했다.

감히 ‘완덕’(perfectio)을 꿈꾸기 시작한 인간들은 교만하게도 하느님을 향하여 올라가려고만 했지, 인간을 향하여 겸손하게 내려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는 대희년 직전까지 인류와 역사 앞에 저지른 자신의 죄와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기를 얼마나 망설이고 두려워해 왔는가!

그러나 교부들은 일찍이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고백할 줄 알았다.

교부들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창녀처럼 추하고 죄스럽지만 우리를 외면하거나 저버리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교부들은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뉘우치는 교회’, ‘쇄신되어야 할 교회’의 본성을 일깨워 주신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공의회는 교부들의 전통 속에 굳건히 서서, ‘거룩하면서도 늘 정화되어야 할 교회’(ecclesia sancta et semper purificanda)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교회 헌장 8항)

‘순결한 창녀’인 교회를 고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죄인을 목숨 바쳐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추함과 아름다움, 죄스러움과 거룩함의 구분을 뛰어넘어 모든 이를 당신의 아내로 맞아주시는 하느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랑의 마음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참으로 순결한 창녀인데, 우리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창녀이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결하다.

최원오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주교회의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