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46】Ⅳ 부활과 재 탄압/2. 메이지의 탄압/1) 장례식 사건

박양자 수녀
입력일 2006-01-08 수정일 2006-01-08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기리시탄 부활의 증인 푸치챤 신부.
불교식 장례 거절하자

포졸들 비밀교회 덮쳐

푸치챤 신부는 우라가미(浦上)를 중심으로 나가사키의 여러 곳과 아마쿠사(天草), 히라도(平戶), 이키츠키(生月), 고토(五島), 이마무라(今村), 이마리(伊万里) 등에 기리시탄들이 산재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1865년 5월까지 3800여명 발견). 선교사의 신자 재교육과 더불어 잠복 기리시탄들은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에도 막부의 금제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메이지 정권은 우라가미 기리시탄 마을을 붕괴하고 신자들을 체포, 고문, 유배시키는 혹독한 재 탄압을 일으켰다. 이어 고토 붕괴, 이마무라와 이마리 기리시탄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메이지 정부의 탄압이라 한다.

1) 장례식 사건

1865년 3월 17일 오우라 천주당에 나타난 우라가미 동네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자연히 감추었던 신앙을 분명히 드러낸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도 다른 기리시탄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도로 위장하여 우라가미 지역의 성덕사에 속하면서 장례식에는 꼭 불승을 초대하여 장사를 지내오고 있었다.

1867년 4월 5일 우라가미 동네의 모요시(茂吉)가 죽었는데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성덕사의 불승을 불러 오는 도중에 심부름꾼이 일부러 불승을 화나게 하여 되돌아가 버렸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모요시의 집에서는 천주당 식으로 장사를 치렀다. 4월 6일 히사쿠라(久藏)가 사망하였을 때는 아예 성덕사에 알리지도 않고 장사를 치렀다. 그것을 안 불승은 촌장에게 고소하여 문제가 시끄럽게 된 와중에, 4월 14일 산하치(三八)의 모친 다카가 또 사망하였다. 이번에는 촌장이 불승을 불러왔지만 유족들은 불경을 거절하고 장례를 치렀다. 일의 심각성을 안 촌장은 지금의 불승이 싫다면 다른 불승으로 바꿔 주겠다고 말했지만 산하치는 “불승은 누구라도 필요 없습니다. 이제 절과 인연을 끓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큰 일 이었다.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 제정된 금제는 조법(祖法)으로서 255년간 어길 수 없는 제도이었다. 당황한 촌장은 “절과 인연을 끓고 싶은 자의 명단을 내라”하여, 이에 700여 호의 마을주민 전부가 이름을 기록하였다.

1867년 7월 15일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우라가미에 있는 비밀교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에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이어 장례식에 불승을 거절한 사람들도 모두 체포 투옥되었다. 이리하여 우라가미 4번째 붕괴(浦上四番崩れ)라 불리는 명치박해가 시작되었다.

투옥 된 신자 중 다카키 센우에문(高木仙右衛門) 외는 모두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이 “신앙을 버린 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당신이 집에 있다면 우리들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사부로(甚三郞)의 수기에 보면 ‘집에 돌아간 즉 집에도 들어갈 수 없고, 밖에도 있을 수 없고 천주님을 버렸다고 생각하면 내 몸 하나 둘 곳이 없어 3일 밤낮을 울었다. 그로부터 천주님과 산타 마리아님의 도움으로 천주님께 돌아서고, 사람들을 격려하여 개심자가 많이 생겨서 죽을 각오로 관청에 출두하여 다시 체포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박양자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