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37】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전집에서

정양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성공회대 초빙교수
입력일 2005-12-18 수정일 20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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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삼 수

[본문]

① 아버지 묘비명

선한 목자 나 그레고리우스는 큰 양떼를 기꺼이 양육했다. 나는 거룩한 그루터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가장으로서 고결한 아내와 세 아이를 거느렸다. 잘 따르는 양떼를 돌보고 지상과 천상의 연수를 채운 다음 이승을 떠났다.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8권에서)

② 어머니 묘비명

어느날 논나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저 높은 데서 하느님이 “오너라”하고 부르셨다. 논나는 기꺼이 육신을 떠났다. 한 손은 (봉헌)상을 붙잡았으며, 또 한 손은 간구하는 모습이었는데 “오, 그리스도 임금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것 같았다.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8권에서)

③ 자기 묘비명

오, 그리스도 임금님, 왜 저를 육신 그물에 가두셨나이까? 왜 저를 적의에 찬 삶에 내맡기셨나이까? 나는 매우 경건한 아버지와 편협하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나는 어머니의 간구로 햇빛을 보았다. 어머니는 기도하여 얻은 어린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다. 나는 꿈에 환시를 보고 독신생활을 열망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을 이룩하신 주인공은 그리스도시다.

그 후에 나는 격랑에 시달렸다. 나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표적이 되었다.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나는 성직자들과 싸웠는데, 그들 가운데 친구는 없고 만나느니 불신이었다. 죄악의 소굴을 멀리하면서 나는 내 아이들을 잃었다.

이게 그레고리우스의 삶이다. 나의 앞날은 나를 지어내신 그리스도의 배려에 맡긴다. 이글을 비석에 새겨라.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7권에서)

“동정녀꿈 꾼후 독신 결심”

[해설]

① 아버지 묘비명 해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6년경~390년경)의 아버지도 그레고리우스로서(275년경~374년) 45년 동안 소읍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재직했다. 그는 쉰 살까지 유다교 이단종파인 ‘지극히 높은 신의 경배자들’ 모임에 나갔는데, 이를 두고 “나는 거룩한 그루터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이라고 했다. 그는 덕성스런 아내 논나의 염원에 따라 325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부부는 한 동안 자녀가 없다가 늦게 장녀 고르고니아, 장남 고레고리우스, 차남 카이사리우스(369년 사망)를 낳아서 잘 길렀다. 이 시대에는 성직자들이 결혼 생활, 독신생활을 각자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결혼생활을 택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100세를 살았으므로 지상의 연수를 다 채웠다고 하고,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 동안 사목했으므로 천상의 연수를 다 채웠다고 한다.

② 어머니 묘비명 해설

그레고리우스 1세의 동갑내기 아내 논나도 남편처럼 천수를 누리고 374년에 선종했다. 논나는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여 늦게 득남하자 장남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서전에서 이를 두고, 어머니는 마치 안나 같고 자기는 마치 사무엘 같다고 했다. 돌계집 노파 안나가 실로 성전에서 간구하여 사무엘을 낳고 그를 실로 성전에 바친 고사를 상기했던 것이다(1사무 1장).

어느날 논나는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기쁜 모습으로 선종했다. 그 때 “한 손은 (봉헌)상을 붙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교우들이 이 상 위에 생필품을 바치면 교회에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상을 가리킨다.

그레고리우스가 어머니를 칭송하는 데는 끝이 없다. 어머니를 두고 “몸은 여자 몸이었지만 성품은 남자 이상 이었다”고 하는데, 논나의 대범한 성품을 지적한 것 같다. 논나는 물심양면으로 교우들을 돌보는 큰 손이었다. 동서방 교회는 다 같이 논나를 성녀로 추대했다. 다복하게 살고서도 성녀가 된 이는 매우 드물다. 축일은 8월 5일. 이승에서도 복 많이 받고 저승에서도 복 듬뿍 받고 싶으면 논나를 주보성녀로 택하라.

③ 자기 묘비명 해설

우선 아들 그레고리우스의 생애 윤곽부터 그려보자. 그레고리우스의 부모는 신심에 더해서 교육열이 강하고 경제적 여유도 있어서 장남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그레고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 에집트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아테네 학당에서 수사학 교육을 받았다. 아테네에선 친구 바실리우스와 합숙하고 함께 공부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356년(30세)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361년 말 또는 362년 초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사제품을 받았다. 자서전에서 “나는 등에에 쏘인 황소마냥 상심을 달래려고 폰투스로 가서” 바실리우스와 함께 한 동안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370년 바실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전체를 다스리는 대주교가 되었는데, 이태 후 372년 발렌스 황제가 카파도키아 지방을 행정적으로 양분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 행정도 영향을 받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는 북부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었고, 티아나의 안티무스는 남부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바실리우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372년 절친한 친구 그레고리우스를 북·남 카파도키아 경계선에 있는 소읍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에 그레고리우스는 분개한 나머지 사시마에 부임하지 않고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어제까지는 우리가 사자였는데, 오늘은 내가 원숭이 꼴이 되었구나.”

374년 부모가 귀천하자 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오늘날 터키 지중해변 항구 실리프케)로 가서 은둔생활을 했다.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아리우스 이단, 아폴리나리스 이단 등이 득세하여 전통교회는 소수로 전락했다. 387년 아리우스 이단을 지지하던 발렌스 황제가 죽고, 379년 동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0년 11월 24일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면서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5~7월)는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추인하고 그를 공의회 의장으로 뽑았다. 그러나 왕년에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된 바 있었던 그가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된 것은 위법이라는 논란이 일자, 그는 공의회 주교들과 교우들 앞에서 그 유명한 고별사(연설 42)를 하고 나지안주스로 물러갔다. 383년 그의 사촌 에울라리우스가 나지안주스 주교로 취임하기까지 임시로 나지안주스 주교좌 일을 보살핀 다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족 영지 아리안주스에서 칩거하다가 390년경에 귀천했다. 생애 약전을 염두에 두고 그 자신의 묘비명을 감상할 차례다. 그는 자다가 꿈에 환시를 보고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정결과 절제라는 이름들을 지닌 두 동정녀가 나타나서 그레고리우스에게 독신을 권했다고 한다. “죄악의 소굴을 멀리하면서 나는 내 아이들을 잃었다”는 말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떠나다 보니, 수도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다정다감한 성품이라 공부하고 글줄이나 썼으면 좋았을 터인데, 어쩌다 사제·주교·대주교가 되어 제대로 일도 못하고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성인 주교의 축일은 동방교회에선 1월 25일, 서방교회에선 1월 2일.

정양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성공회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