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44】Ⅳ 부활과 재 탄압/1. 기리시탄 부활/1) 일본 재 포교

박양자
입력일 2005-12-11 수정일 200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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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봉헌된 오우라 천주당. 당시 프랑스사(寺)라 불리기도 한 이 성당은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일불통상조약 체결로 에도막부 쇄국 문열어

예수회는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전하여 초기에 그리스도교 문화의 꽃을 피워 나가사키를 ‘소 로마’로 불릴 정도로 발전시겼다. 박해와 순교시대에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의 선교사들도 목숨을 걸고 기리시탄들을 돌보았다.

그 후 추방과 쇄국, 엄한 검색으로 약 250여년의 잠복시대를 살고 있던 동안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본의 기리시탄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때가 되어 로마교회는 당시 극동지방의 포교를 담당한 파리외방전교회에 일본 재 포교를 위탁하게 되었다. 1831년 조선에 조선대목구를 설치하였고, 거기서부터 일본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지만 조선에서 기해대박해가 있어서 단념하게 되었다.

유럽의 산업 혁명과 그 영향에 따라 구미 제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시장을 구하고 대규모의 식민지 형성과 통상조약 체결 등으로 세계정세는 극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쇄국과 기리시탄 금제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사정과 세계정세 가운데서 근대 일본의 그리스도교 재 포교와 가톨릭교회의 기반을 확립해 간 것은 파리외방전교회였다.

1844년 마카오에 있던 파리외방선교회(MEP)의 극동 지부가 프랑스 군함을 통해 선교사 한명과 중국인 전도사를 류큐(琉球)에 상륙시킨 것이 일본 재 포교의 제 일보를 내 디딘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엄한 쇄국과 기리시탄 금제로 연금 상태에서 도민과의 접촉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몇 차례 선교사들의 병사와 귀국을 되풀이 하면서 1855년 지라르와 휴레, 메르메 신부가 류큐에 상륙하였지만 역시 성형사(聖現寺)에 연금되어 오직 일본의 쇄국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일본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1858년 드디어 에도막부는 일·불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쇄국의 문을 열었다. 지라르(Girard) 신부는 일본 대목에 임명되어 프랑스 총 영사의 통역관 겸 사제로서 요코하마(橫浜) 외국인 거류지를 거점으로 해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지라르 신부는 무니크(Mounicou) 신부와 함께 요코하마 거류지 80번지에 금색 십자가의 고딕식 천주당을 건립하여 1862년 1월 12일에 헌당식을 올리고 ‘성심교회’라 이름 하였다. 매일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구경하러 밀려들었다. 경계를 하고 있던 막부는 드디어 33명을 포박하는 ‘요코하마 천주당 사건’까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옛날의 기리시탄 후손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을 희망하며 그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큰 희망을 안고 휴레 신부와 푸치쟌 신부가 1863년 1월 22일에 나가사키로 옮겨왔다. 푸치쟌 신부는 1865년 2월에 나가사키 외국인 거류지의 미나미 야마노 테(南山手)에 일본 26위 성인에게 봉헌된 금빛 찬란한 고딕식 오우라(大浦) 천주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이 천주당을 ‘프랑스사(寺)’라 불렀다. 그 후 연일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박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