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6】감사의 글을 가름하여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5-06-26 수정일 200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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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는 『가장 엄청난 보물은 성사이며, 성사의 풍요함과 은총은 무궁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 은총에 신자들이 눈뜬다면 스스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 은총 재발굴·중재해야”

거저 주어진 영적 선물에 눈뜬다면 신자들 스스로 빛과 소금으로 살것

한국 천주교회에 주어진 기회연한

지난해 이헌재 전(前) 부총리는 한국사회에 주어진 기회는 15년이라는 발언을 했다. 2020년에 한국은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될 터인데 이때까지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파국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에 주어진 기회는 그보다 훨씬 짧다. 필자는 이를 짧게 잡으면 5년 길게 잡아야 10년이라고 본다. 2003년도와 2004년도 교세통계에 의하면 40대 미만의 신자들이 평균 10%를 육박하는 신자감소 비율을 보이고 있다. 젊은층 신자가 줄어드는 것이 그야말로 깨진 바가지에 물새는 듯 하다. 이런 현상이 5년만 지속되어도 본당에서는 50대 미만의 신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될 지경에 이를 것이다.

교회라는 것이 양적으로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질적으로 성장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일단 양적으로 허물어지면 질에 대해서는 얘기할 기회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듯이 교회가 무척 힘들다. 주어진 기간은 길지 않다. 손을 쓸 수 있는 기간은 불과 몇 년이다. 시기를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힘들 것이다.

교회는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글에서 필자는 21세기 한국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짚어보고 그 대안도 여러 가지로 모색해 봤다.

여기서 한 가지 해명하고 싶다. 필자는 교회 밖의 현안들에 대한 교회의 투신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필진들의 몫으로 유보하고 교회 내부의 문제들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워낙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기에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 문제에 골몰하였다. 이러다 보니 아무래도 글을 쓰는 사유지평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한다.

차제에 밝히거니와 필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성령기도모임의 활성화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회참여운동과 영성운동이 기막히게 통합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에 집중할 수 없기에 다만 묵시적인 동의를 전제하고서 특정분야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따름이다. 자신의 관심과 역량을 하는 수 없이 전문영역에 경주할 따름이다.

교회는 오케스트라이다. 다양한 은사가 모여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협연이다. 관악기 연주자가 현악기 연주자에게 너는 왜 그것을 연주하느냐고 탓하지 않듯이 교회의 모든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은 다른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을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최대한 조화를 이루며 합심하여 감동적인 화음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소명이다.

은총의 시대를 내다보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 3).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여 거기에서 자신에게 요청되는 사명을 깨닫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신자 개인을 위한 말씀인 동시에 교회를 위한 말씀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사명을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라고 이름하였다. 교회(사도직)의 현대적 적응, 이는 바로 예수님의 명령이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가야할 길은 「은총」을 재발굴하고 중재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은총은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공짜」로 주어진 영적 선물을 말한다. 이 은총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격인 유다교의 경전 구약성서에서 발견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 1).

그렇다. 「돈 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관점에서 신앙을 새롭게 조명하고 교육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나름대로 저술 및 강의를 통해서 신나는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다닌다. 필자의 글과 강의 속에서는 「의무」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의무라는 단어를 「은총」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무를 뒤집으면 거기서 은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무척 힘들다. 하지만 필자는 곳곳에서 희망을 본다. 「은총」이라는 명약이 듣는다는 확신을 얻는다.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교무금이 늘고, 헌금이 늘고, 교회헌신이 좋아진다. 「은총」에 눈을 뜨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알아서 바르게 살고, 사회에서도 당당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놓쳐왔던 「은총」에 눈뜨는 신자가 하나 둘 늘어간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나씩 둘씩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차 어느 날엔가 /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 와서 말하리라. /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이사 2, 2~3).

고백하건대 고단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단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은 자」들을 보여주셨다. 그들을 통해 지원해 주셨다. 존경하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사랑하는 신자들이 힘을 보태주셨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모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1년 반 동안 필자와 같은 배를 탔던 가톨릭신문사 임직원 모두에게도 감사드린다.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묵시 4, 11).

아멘!

■‘이것이 가톨릭이다’ 연재 마친 차동엽 신부

“가톨릭 정체성 확인 작업, 독자들 호응에 깊은 감사”

가톨릭은 부족함이 없다

『가톨릭은 갖추고 있는 면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전부입니다』

1년 6개월의 장기연재 「이것이 가톨릭이다」를 마치면서 필자인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가 강조하는 바이다.

『가장 엄청난 보물은 성사입니다. 때로는 소홀히 취급하고 만만하게 보기도 하지만 성사의 풍요함과 은총은 무궁한 것입니다』

이미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충분히 제시된 것이지만, 차신부는 그것을 2명의 위대한 가톨릭 신자에게서 확인했다.

한 명은 선종 1주년을 맞은 구상 시인. 시인이 만년에 도달한 신앙의 경지는 가톨릭에 대한 만족과 자긍심이다. 차신부는 시인이 더없이 풍성한 가톨릭의 전통과 보고, 자산을 만끽했음을 알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치릴로 성인이다. 성인에게, 내용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대상을 두루 포섭한 것이 바로 가톨릭이었다. 이 두 가톨릭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가톨릭은 그래서 『갖추고 있는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문제는 이제 교회와 신자들의 과제로 이어진다. 성사의 풍요로움을 시대에 맞는 버전(version)으로, 업그레이드된 컨텐츠로 현대인과 현대세계에 제시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과제이다.

「이것이 가톨릭이다」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시험적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는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와도 관련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전통과 문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좀 더 생생하게, 지금 살아있는 우리 문화의 영적인 욕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영적 자산의 풍요로움은 자연스럽게 정체성의 문제를 강조한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주목을 통해서 자신의 풍요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다원주의가 객관성과 공정성으로 간주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정체성의 추구를 통해 자기가 품고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기획 연재의 제목 자체가 드러내듯이, 가톨릭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호응을 보여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니 개방성과 열린 자세의 문제 제기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차 신부는 「역할 분담론」을 말한다.

『오케스트라에서처럼 저는 제 악기를 연주했고, 다른 연주자는 자기가 맡은 또 다른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것이 모여서 훌륭한 교향악을 이루게 될 겁니다』

먼저 예수님과 복음 배워야

차신부는 같은 맥락에서 신자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우선 공부하도록 권한다.

『신학자로서 고백합니다. 아직 예수님 한 분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선 예수님과 복음을 공부하는게 우선적인 과제입니다. 최선을 다해 몰입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교리와 신앙을 어느 정도 공부했다 싶으면, 그 다음에 풍요로운 다른 문화와 전통을 공부하라는 당부이다. 「새복음화」와 「재복음화」 모두 중요하지만, 오늘날 현실 속에서 「재복음화」는 우선적인 과제라는 것이 차신부의 생각이다.

연재를 마치면서 미처 못 다한 이야기도 있다. 유불선에 통달했던 초기 교회의 신앙선조들이 왜 그토록 천주실의에 매달렸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하는 의문이다.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커다란 신앙의 광맥이 있음을 발견했고, 어설픈 언급을 피하기 위해 장기간의 숙제로 남겼습니다』

개인 신앙생활은 물론 사목 전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좀더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차신부는 연재를 마치면서, 가톨릭신문사와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