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5】21세기 영성(6) - 통전영성

입력일 2005-06-19 수정일 200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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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도해(experience cycle)
“올바른 영성은 성-속 구별 없어”

안팎 영육 현세내세 모두 아울러

‘정구사-다락방’ 활동 서로 관통

정의구현사제단과 사제다락방기도모임

근래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정치적-사회적 민주화를 위해서 기여한 공로를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만끽하고 있는 자유가 「당연히」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기겠지만, 이런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 정의구현사제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의 의로운 투신과 희생이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시기에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이라는 것이 있어왔음을 별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모임은 마리아사제운동 회원 사제들이 교구단위로 모여서 사제성화 및 인류(특히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희생-보속을 대신 바쳐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여기서 진지한 물음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두 모임은 전혀 색깔이 다른 단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 정반대 노선을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만일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영성은 아직 「반 쪽」 영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두 단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호보완하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서 영험한 권위가 묻어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뒤에서 기도해준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내조(內助)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기도지향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외조(外助)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목에서도 그렇고 영성생활에서도 그렇다. 곧 우리에게는 통전적 안목(integral perspective)이 필요하다.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다」(spiritual)라고 말할 때, 이 단어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곧 「영적인」이라는 말은 흔히 「세속적인」, 「물질적인」, 또는 「육체적인」의 반대말, 나아가 「현세적인」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성(spirituality)은 거룩하고, 비물질적-비육체적이며, 내세지향적인 태도로 하느님께 접근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하지만 성서는 「영적이다」라는 말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 즉, 「영적이다」라는 말은 성령이 내주(內住)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로마 8, 9; 1고린 2, 14~15)을 의미한다. 이 말은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신음하고 계시며(로마 8, 22) 인간 실존의 심층에서 「양심」(로마 9, 1) 안에 살아계시며 말할 수 없이 「깊은 탄식」으로 기도해 주신다(로마 8, 26)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매우 폭넓은 지평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성을 「성령을 통해 우리 안과 우리 주변에서 실제적으로 임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에 대해 응답하기 위하여 삶을 영위하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은 안과 밖, 영과 육, 성(聖)과 속(俗), 현세와 내세를 구별 없이 아우를 때 가능해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우리는 단일론(Monism)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무소부재(ubiquitous)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에너지 또는 기(氣)의 양태로 삼라만상 안에 서려있지만 모든 「에너지」와 모든 「기」가 성령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통전영성의 성찰도구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성을 통전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까? 미국 가톨릭교회 단체인 「영성과 정의 센터」의 아이너 쉐어(Einor Shea)와 존 모스틴(John Mostyn)이 이를 돕는 훌륭한 성찰도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은 이를 「경험도해」(Experience Circle)라 부른다.

이 경험도해는 세 개의 동심원들이 정확히 네 영역으로 나뉘어 사분원(四分圓)을 이루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사분된 영역은 인간 존재의 네 차원을 나타낸다. 곧 내면적 차원, 인간 상호간의 차원, 구조적인 차원, 그리고 환경적인 차원을 표시한다. 그리고 세 개의 동심원들은 영적 식별의 여러 차원을 나타낸다. 그림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고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면서 비주제적 차원, 반성적 차원, 해석적 차원 등이 배속되어 있다.

이 도해를 유익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 하느님은 모든 경험의 깊이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중심에 존재한다.

- 영성의 목표는 우리가 성령(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도록 하는 데 있다.

- 이 도해에서는 기본적으로 칼 라너(Karl Rahner)의 「동시성의 원리」라는 신학적 입장을 따라 인간 존재의 여러 차원이 서로 삼투하면서 통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따로따로 독립된 차원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연관되어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 네 가지 차원 안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의식(意識)은 본성적으로 어느 한 시점, 한 차원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식별할 때는 한 두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 각 존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에 대한 식별은 「비주제적인」 것(깊은 경험을 할 수록 주제화하기가 어렵다!)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반성해 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의식 곧 「반성적」 의식에 도달한다. 마침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에 제공하는 의미를 발견함으로 「해석적」 의식에 도달하고 이제 이와 관련된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영성형성이라 부른다.

좀 생경한 개념들이지만 가만히 짚어보면 이들은 우리가 통전영성을 영위하는데 탁월한 성찰도구가 되어주고 있다. 요컨대, 이 도해는 인간 삶의 네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에 관한 동시적 경험을 통해서 인간 경험의 비주제적 차원, 반성적 차원, 해석적인 차원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데서 가치를 지닌다.

예컨대, 이 도해에 준할 때, 서두에서 언급된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이 인간존재의 「구조적」 내지 「환경적」 차원에서의 하느님 뜻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활동은 「내면적」 내지 「인간상호간」의 차원에 중심을 둔 하느님 뜻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들은 서로 독립된 활동이 아니라 상호 관통하는 동시적인 관련성 안에서 통전영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