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4】21세기 영성(5) - 생태영성

입력일 2005-06-12 수정일 200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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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실천에 앞장서야”

교회환경운동 낙후성 면치못해

우주차원의 생태영성운동 필요

생태가 웰빙이다

21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웰빙(wellbeing)열풍」은 그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면 『파괴된 자연 속에서의 「자연」의 상품화』라고 압축할 수 있다. 웰빙의 주상품들은 하나같이 무공해, 천연소재, 여유 등을 지향한다. 한 마디로 자연(自然)이 최고의 상품인 것이다. 공기청정기, 정수기 등으로 대변되는 웰빙 가전제품들이 생산해 내는 것들도 말이 첨단이지 사실은 자연이 살아있었을 때는 누구나 누리던 맑은 공기와 청정수에는 비길 수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는 가난한 이들 모두의 주거였던 황토방과 귀틀집이 오늘날에는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는 사실이 웰빙 문화가 지니고 있는 역설인 것이다.

요컨대, 현대인이 누리는 웰빙은 파괴된 생태(生態)에 대한 차선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웰빙은 원시생태의 복원이라는 말이다. 곧 생태보전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대안이요 최고의 웰빙인 것이다.

왜 생태영성이어야 하는가?

생태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한국 가톨릭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다각도로 환경운동을 전개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에는 정의평화위원회가 있고, 이 위원회 안에 환경소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 또한 전국교구의 환경과 생태영성운동 단체들 대부분이 참여한 천주교환경연대 역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톨릭 환경운동과 생태영성운동은 현재 전국의 거의 모든 교구에서 펼쳐지고 있다(황종렬, 「생태복음화 모델 연구」, <2005년 미래사목대안 학술 발표회 자료집>, 69쪽 참조).

그런데 원주교구 이동훈 신부는 이러한 가톨릭 환경운동의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의 환경운동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사회운동의 부문운동 정도로 인식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환경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나 신자들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것이다. … 환경보전의 임무가 신앙인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의식에는 크게 못 미치고 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생활 속의 실천에만 그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영성으로 드러나는 운동이 없었다. …가톨릭 환경운동은 환경운동을 신앙인의 본분으로 인식하는 창조영성, 생태영성을 진작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고 사회 환경단체의 활동과 차별성을 구현해 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이동훈, 「가톨릭 환경운동의 방향과 과제」, <2003년 천주교환경연대 제1차 정기총회 자료집>, 48쪽)

이동훈 신부가 말하는 요지는 실천과 운동만 있었지 신학과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는 각 교구의 환경교육의 대부분이 올바른 먹거리, 재활용, 개발 사업의 부당성 등의 실천적인 부분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교회 내에서의 환경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이며 가톨릭적인 독특성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 환경단체들과 대동소이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문성과 지속성에서 낙후된 모습을 보이며 그들에게 종속적인 처지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내부에서는 환경과 생태운동을 위한 신학적 성찰이 제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윤리 신학적 차원에 머무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이동훈 신부는 「가톨릭 환경운동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생태영성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영성의 지평

그러면 우리는 어떤 지평에서 생태영성을 도모하여야 할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태영성은 환경문제를 우주 차원의 하느님의 집안 인식에 근거한 「하느님의 생명 공동체의 연대와 구원」의 전망에서 접근하는 것을 요청한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2005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시의적절하게 생태영성의 중요성과 방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담화문에 따르면 생태영성은 먹거리 문화에서부터 국가 농업 및 환경정책,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통전적 지평을 견지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생태영성이 포괄해야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생태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 안에서 생태영성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곧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형성된 영성과 신학과 사목 전통들을 존중하면서 한국교회의 역사와 그 속에서 펼쳐진 노력을 바르게 인식하여 이를 자기의 생태 복음화 사명에 역동적으로 통합할 안목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는 생태영성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생태복음화의 영성적 기초는 하느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신뢰이다.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것에 생명 있고, 축복 있고, 선이 있다(창세 1장 참조).

-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사도 3, 15)으로 고백한다.

- 성령께서는 만물 안에서 구원을 향하여 역사하신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 22).

둘째, 생태영성의 일환으로 정의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생태영성과 정의구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무공해를 찾고 이른바 「구매」 능력을 갖는 이들은 지금까지 선두에서 공해를 유발시킨 주역들이기 십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생태와 정의의 분리는 오히려 생태 정의를 왜곡시킨다. 공해 발생 주역은 자본을 축적하여 생태계를 계속해서 파괴할 자본력을 확보하는 가운데 공해를 피하여 휴가를 취할 가능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서 공해 피해를 직접 겪는 서민은 계속해서 공해를 떠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생태영성은 반드시 정의구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소박한 삶」의 실천에 앞장서는 일이다. 무절제한 소비문화가 생태파괴의 주범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은 소박한 삶(simple life)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범종교적으로 실시하는 음식물쓰레기 안남기기 운동은 그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생태영성의 알파요 오메가인 명제는 생명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