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2】21세기 영성(3) - 성체영성

입력일 2005-05-29 수정일 200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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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는 ‘살과 피’가 된 말씀

영하면 내 ‘살과 피’가 되고 가난한 이 위해 투신하게 해

앞에서 「성찬의 원리」, 「성사」, 「가톨릭교회의 보고」 등의 측면에서 성체(聖體)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이제 그 종합으로서 성체영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체의 원적외선 효과

좀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성체조배의 은총을 원적외선 효과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많은 신자들이 성체조배의 요령을 몰라서 별별 수를 다 쓰면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를 뒤척이거나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고 좋은 대안을 찾고 있을 때 얼른 떠올랐던 영감이었다. 이후 필자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왔다.

『여러분, 찜질방에 가보신적 있으시죠? 거기서 원적외선을 쬐며 땀을 뺄 때, 무슨 요령 같은 것이 필요합니까? 아니죠. 그냥 쬐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성체조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조배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것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성체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졸음이 오면 졸면서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다만 딴전을 부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눈 앞에, 코 앞에 계신데 성서 같은 거 펴들고 읽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집중이 잘 안되어도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가 나온다는 심정으로 시간을 버텨보세요. 그러면 어느새 자신의 육신, 마음, 영혼에 예수님의 현존이 삼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성심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좋은 일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느 교우가 강의 끝에 남아서 필자에게 증언을 해 주었다. 그의 요지는 이랬다. 그는 어느 사제의 형이다. 여러 해전 그는 사업실패로 위기를 맞이하였다.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을 찾았다. 하지만 기도가 되지를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1시간가량 앉았다가 집으로 왔다. 다음날도 또 기도를 해볼 요량으로 성당을 찾았다. 그날도 무슨 힘에 압도당한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뭔가 감이 올 때까지 매일 1시간씩 성당을 찾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용케도 잘 버텨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돌이켜 보니, 자신이 해왔던 것이 바로 「성체조배」라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기도하고 싶었던 지향이 오늘에 와서 생각하니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청원기도는 실패했지만 어느새 그보다 더 깊은 기도인 성체조배를 몸에 익혔다는 것이 더없이 은혜로운 일이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단지 1시간씩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과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 9).

육화된 말씀, 성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을까? (복음)말씀을 주셨으면 되었지, 왜 그것에 더하여 성체까지 선물로 주셨을까? 말씀으로는 족하지 않다는 예지에서였을까?』

개신교에는 이른바 카리스마 넘치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있다. 신도들에게는 말씀의 은혜가 넘친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우리에게는 부럽기만 한 현실이다. 분명 이는 가톨릭교회에 분발을 촉구하는 저들의 장점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필자에게 깨달음이 왔다. 곧 성체가 말씀의 육화(肉化)요 성취(成就)요 구현(具現)이라는 사실에 불현듯 마음이 열렸던 것이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말씀은 이해를 해야 은총이 된다. 그래서 말씀의 은총은 사람마다 달리 누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씀이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능(知能)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성체는 이미 「살」이 되고 「피」가 된 말씀이다. 그래서 그냥 영(領)하기만 하면 이해력에 상관없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주신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은 성체가 예수님의 심장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이는 성체가 우리의 마음이 예수 성심(聖心)을 닮도록 해주는 매체가 되어 준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성체는 신비한 주님의 현존이시기에 몸에 모시지 않고 그냥 그 앞에 앉아있기만 해도 우리를 주님의 현존으로 휘감아 주신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성체의 원적외선 효과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육화된 (복음)말씀을 자신 안에 모시게 된다. 성체 조배를 통해서 우리는 육화된 말씀의 현존에 휘감기게 된다. 결국 성체는 말씀의 완성인 셈이다. 이는 예수님 생애에서도 드러났고 오늘 우리 안에서도 체험되는 현실이다. 예수님의 (복음)말씀은 파스카 제사(「몸」과 「피」의 제헌)로 완성되었고 그 파스카 제사를 송두리째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성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다음의 예수님 말씀은 그대로 우리 안에서 사실로 체험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

성체의 삶

미사 끝에 사제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는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라고 하며 신자들을 파견한다. 이것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파견이다. 그래서 미사 전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50% 참여하는 것이며, 성당을 나와서 내 생명을 내어놓는 우리 사랑의 구체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에 나머지 50%가 완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셨다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의 결합은 형제적 인간 결합에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순환적 흐름을 우리는 성체영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7항).

이러한 당위를 몸소 실행했던 이가 복녀 마더 데레사였다. 그녀 안에서 우리는 성체영성의 전형을 만난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권고한다. 『일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선 예수님과의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성체성사적 일치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