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70】21세기 영성(1) - 갈피잡기

입력일 2005-05-15 수정일 200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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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없는 양들 뿔뿔이 흩어져

‘복음·성체·증거·생태·통전’

다섯가지 영성적 대안 제시

지금까지 「이것이 가톨릭이다」라는 제하에 취급할 수 있는 주제들을 얼추 다루어 봤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산맥(山脈) 가운데 몇몇 산, 숲, 나무들만 둘러본 격에 지나지 않는다. 마저 발을 디뎌봐야 할 지대(地帶)들이 아쉬움의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있으려니 하는 미련을 품으면서 이제 행낭을 추슬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렇게 머지않아 있을 작별을 예감하면서 마지막 행보의 발 머리를 「2l세기 영성」이라는 봉우리를 향해 돌려 보고자 한다. 봉우리에 올라 일출(日出)을 보고 하산할 것이다.

메시지가 있다

2004년 갤럽조사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각 종교별 교세 성장률에서 불교가 3.2%, 개신교가 0.9%, 가톨릭이 0.7%를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70년대 말 이후 줄곧 선두권을 유지해왔음에 비할 때, 실망스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낙심할 것이 아니라 얼른 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도대체 이런 사태의 원인과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곧 이런 현상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심신(心身)의 안정(安定)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갈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한마디로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받기 위하여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며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다. 베트남 출신 승려 틱 낫한은 이런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통찰하기라도 한 듯이 「화(anger)」와 「힘(power)」이라는 책 두 권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는 「화」라는 책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그리고 「힘」이라는 책에서 「생존경쟁」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여, 결국 불교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공헌하였던 것이다. 또 요 근래에 불교에서는 「사찰체험(temple stay)」을 통하여 대중을 끌어들이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불교 측에서는 이미 현대인의 심리적 욕구를 읽어내어 이를 포교(布敎)의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심리적인 안정을 갈구하기는 가톨릭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어딘가 용한 「답」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게 된다. 점을 치고, 무당을 찾고, 신흥영성에도 기웃거려보고, 명상이나 수련법도 배워본다. 이렇게 그저 소박하게 낯선 지역에 발을 들여놨다가 마침내는 종교적 일탈(逸脫)로 이어지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적 외도나 일탈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금령으로만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어떤 고통과 불안을 안고서 그 「해답」을 찾아 여기 저기 방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헤아려 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설령 신자들의 심리적 욕구 내지 영적 갈증을 파악하기는 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가톨릭적 해법을 명쾌하게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 실제다.

이러함에 가톨릭교회의 한 사제로서 필자에게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토로하시는 하느님의 애절한 음성이 매일이고 환청처럼 들려온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다니지 않았다』(34, 5~8).

이는 그저 2500년 전의 신탁(神託)이 아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목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처절한 절규이다. 그렇다. 사목자들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얻지 못한 치유, 위로, 평화, 행복을 찾아 「산」과 「언덕」을 헤매는 양들의 속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러 「야수」와 「들짐승」에게 물려가 이리저리 찢긴 처참한 영혼의 사정을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한다.

5가지 우선적 선택

다시 큰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20세기 하반기 물질의 풍요와 성공을 추구해온 현대인들은 이것들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고갈을 체험했다.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증상, 인간의 존엄성 실추, 그리고 환경파괴 등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이 물질의 추구로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장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하던 행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상처투성이인 채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며 갈증만 더 심해갔다. 물질과 감각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에 대한 굶주림을 갖게 된 것이다.

승전보를 기약하며 도도하게 전쟁터에 나갔던 용사들이 저마다들의 상처들을 안고 지친 영육(靈肉)을 질질 끌면서 치유와 안식, 심기일전과 재충전을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신앙생활에 기대어 보려고 교회를 찾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는 이런 처지에 있는 21세기 사람들에게 어떤 영성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5가지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보인다.

첫째, 복음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고 이루신 것은 복음(福音)으로 압축될 수 있다.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 치유, 해방, 행복 등을 만난다. 현대인의 영적 갈증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복음 하나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의무」에 시달리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은총」 넘치는 신나는 것이 될 수 있다.

둘째, 성체영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복음으로 「압축」하셨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성체에 「담아」 주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몸소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피와 살이 되어 주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공경하고 관상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누려야할 특권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증거영성이다. 12사도에게 있어서 증거할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의 원천은 「성령」이었고, 증거의 내용은 「복음」이었으며, 증거의 완수방식은 「순교」였다. 이 세 가지가 증거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생태영성이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지평은 전피조계 곧 우주적 생태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영성은 의당 생태영성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오늘날 자연영성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욕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대안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통전영성이다. 치우치면 결함과 왜곡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知)-정(情)-의(意), 대아(對我)-대인(對人)-대신(對神) 등의 전반을 아우르는 영성을 지향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스케치만 해봤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세부 그림을 그려볼 것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