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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증거자들(1)

입력일 2005-05-01 수정일 200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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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토마스는 애국자이자 신앙인이었다.
안중근의 저격은 신앙행위

조국과 동포를 지키려한 살인

애국심과 신앙심에 따른 결단

시대마다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감동과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투신(投身)은 가장 강력한 웅변이다. 이 시대의 영성에 빛을 던져줄 대표적인 예(例)만 들어보기로 한다.

시험의 추억

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소위 오럴테스트(oral test), 곧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 때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었다.

『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이미 몇 사람의 생명이 희생당했고 분위기는 점점 위험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필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자를 쏘겠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필자는 대답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되어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필자는 「정당방위론」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의도가 「불가피한 우선선택의 원리」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의사(義士)와 증거자(證據者)

며칠 전 어느 독자로부터 연구원을 통해 전화 문의를 전달 받았다. 「여기에 물이 있다」를 읽다가 안중근 의사를 위대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소개한 대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곧 그 분 질문의 요지는 『어째서 안 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신앙 행위냐』는 것이었다. 애국행위로 봐 주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신앙행위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국민들은 안중근을 의사(義士) 또는 애국지사(愛國志士)로 기억한다. 하지만 근래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런 애국행위의 배경에 굳은 가톨릭 신앙심이 있다고 보려는 움직임들이 활발히 일고 있다.

노길명 교수(고려대)는 논문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에서 안중근을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보고 있다(제100회 한국 교회사 연구 발표회 기념 학술 발표회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신앙과 민족운동」 참조). 노 교수는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당시 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로 봐야한다고 제언한다.

또한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는 『그분의 짧은 생애 그 하나하나가 바로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주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은 너무도 똑같습니다. 너무도 닮았습니다』고 고백한다(신성국 역,「의사 안중근(도마)」참조).

증거자 안중근

안중근(1879~1910)은 황해도 청계동 성당에서 18세(1897년 1월 11일)에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대륙 침략을 꾀하기 위해 러시아 대장(大藏) 대신과 만나려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십자표시를 새긴 세 발의 총알을 쏜 후, 안 토마스는 혈서로 「독립 자유」라는 글자를 써넣은 태극기를 품속에서 꺼내 흔들며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고 한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후 곧 죽자 십자성호를 긋고 『천주여, 포악한 놈을 무찌르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드린 후 러시아 헌병에게 태연히 포박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의 애국심과 신앙심이 결국은 하나였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 토마스는 자신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천주교 교리에서 금지한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그는 사형 집행 전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아들(준생, 베네딕토)을 성직자로 키워 주기를 유언했다. 또한 2천만 형제자매들이 교육과 실업에 힘써 국권을 회복시키며, 성직자들은 민족 복음화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냉담한 교우들에게 신앙을 독려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대한 독립과 동아 민족의 행복을 위해 죽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예수님의 성화(聖畵)를 간직한 채, 『대한 독립 만세』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른 후 미소를 띠며 1910년 3월 26일 여순 형무소 교수대에서 그의 영혼은 거룩하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잠깐 곁길로 들어가면, 이렇게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는 것이 일제의 공식 발표다. 그러나 현지에는 놀라운 이설(異說)이 남아있다. 안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는 안 의사를 교수형에 처한 게 아니고 찜통에 쪄서 죽였다는 것이며, 죽이기 전에 쇠못이 박힌 철판 위를 걷게 하는 모진 고문을 가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안정근.공근 두 친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의 유해를 왜간장통에 넣어 감옥 안의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한국과 한국교회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침 없는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을 불사른 신앙의 대선배로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마음껏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신앙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