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9) 성 예로니모

입력일 2004-11-07 수정일 2004-11-07 발행일 2004-11-07 제 2422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학식과 체통 버리고 알몸의 영혼 드러내
유학 시절 이웃에 살던 독일 할아버지는 작은 목조 이층집을 지어서 비둘기를 키웠다. 2차 대전 때 발을 다치는 바람에 비둘기 사육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똑같은 사료를 먹고 보살핌을 받는 비둘기인데, 어떤 놈은 한 마리 가격이 20마르크, 어떤 놈은 2000마르크나 나간다는 것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여쭈었더니, 비둘기 발에다 편지를 매달아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까지 날려 보내면 비싼 놈은 한 눈을 파는 법 없이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최단 시간에 임무를 완수한다고 했다. 그런데 싸구려 비둘기는 중간에 마인츠에 들러서 이웃 안부도 물어보고 또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어여쁜 비둘기와 소개팅을 하고 정분이 나서 살림을 차리는 등 언제쯤 뮌헨에 편지를 전달할지 그야말로 하세월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문득 구약성서 욥기가 떠올랐다. 야훼께서 사탄과 내기를 하시는데, 욥이라는 이름의 바른생활 사나이를 사탄이 의심과 유혹으로 실컷 흔들어본다는 내용이다. 욥기 첫머리에서 야훼께서는 사탄에게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신다. 사탄의 대꾸가 인상적인데, 『땅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욥 1, 7 circuivi terram et perambulavi eam).

하느님께서 사탄 같은 말도 안 되는 악종과 친히 대화를 나누신다는 것은 좀 뜻밖이다. 속으로 무척 내키지 않으셨을 텐데, 아마 우리들에게 세상을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며 방황하는 행위가 못돼먹은 사탄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다.

그런데 독일의 시인 괴테는 『방황하는 영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욥기의 교훈과는 정반대이다. 이 말은 삶의 방황을 다 겪고 나서 시냇가 차돌맹이처럼 영혼이 말갛게 씻긴 다음에 털어놓는 파우스트적인 고백으로 들린다.

사실 교회의 웃어른으로 섬김을 받는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노도 얼마나 처절하게 방황을 겪었던가. 빈들에서 고행했던 안토니오에게는 사탄이 달콤한 처녀로 변신해서 알몸으로 유혹의 공세를 펼쳤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의 플라젤란티라(flagellanti)고 불리는 수도자들은 영혼의 방황을 경계하려고 속에 엉큼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참회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채찍이나 회초리를 들고 제 몸을 사정없이 후려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면 상처가 무척 심하게 날 텐데, 아마 품속에다 늘 빨간 약을 상비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46×36.5cm. 1474년. 국립미술관. 런던.
성 예로니모(347년~419년)도 시쳇말로 한 방황을 한 인물이다. 우리가 오늘날 즐겨 읽고 인용하는 라틴성서가 바로 이 분의 번역이라고 한다. 학창시절에 외국어 영역에서 내신 일등급을 항상 도맡았던 모양인데, 이처럼 빛나는 성서 번역을 완성하고도 번역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서 인세도 변변히 못 챙기셨을 게 분명하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그림에서 성 예로니모는 서재에 앉아 있다. 옷이 추기경 차림이지만, 이건 약간 오해가 있다. 화가들이 성 예로니모를 두고 그렇게 박식하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추기경의 지위에 오르셨을 거야, 하고 막연히 어림짐작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만 후대의 미술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널찍한 실내에는 근사한 서가가 서 있고, 책도 많이 꽂혀 있다. 그림 앞쪽에 테두리 형식으로 문을 내고 관찰자의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 성자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화가의 조심스런 배려일 것이다. 덕분에 평면 그림 속에 그럴 듯한 원근법적 공간이 짜여졌다.

겉으로야 이렇게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 예로니모도 젊은 시절에는 로마에서 못된 친구들과 사귀면서 인생을 탕진하기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위인들이 그런 것처럼 성 예로니모는 곧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고 뉘우친다. 고행의 좁은 오솔길을 선택한 것이다.

쓸쓸한 광야에서 홀로 전갈의 무리와 사귀고, 야생동물과 어울리던 성 예로니모는 때로는 지난 자책과 회한으로 몸부림친다. 해괴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없이 이름다운 처녀들이 눈앞에 떼지어 나타나 맴돌이 춤을 출 때면, 꿈속에서 에로니모의 꺼진 욕망의 불길이 살아나곤 했다. 잠에서 깬 예로니모는 마음을 터놓는 옛 친구 에우스토키오에게 편지를 써서 영혼의 몹쓸 방황을 하고 말았노라고 털어놓는다. 남아 있는 편짓글을 읽으면 채찍과 단식으로 평화를 되찾은 수도자의 눈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가슴을 사정없이 때리지. 그러고 나면 하느님의 평화가 다시 깃들곤 한다네』

위인전을 들추다가 이런 대목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칭송해마지 않는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다만 휘황한 금박으로 덧칠되어 있다면 오히려 몇 줄 읽다말고 코웃음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잘난 학식이나 체통 따위 걸림 없이 벗어던지고 알몸의 영혼을 드러내 보이는 것, 성 예로니모에게서 배울만한 참된 교훈은 이런 것이 아닐까.

위 그림의 부분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