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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얼마나 아십니까? (41) 전례공간 (1)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입력일 2004-10-17 수정일 2004-10-17 발행일 2004-10-17 제 241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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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는 교회의 원천이요 머리이며 중심인 그리스도 신비의 표지
제대 (1)

교회 건축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비의 표지라면, 제대는 교회의 원천이요 머리이며 중심인 그리스도의 신비의 표지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제대 없이 그리스도를 언급할 수 없다」고 데살로니카의 시메온은 말한다. 이처럼 제대는 전례 거행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제대는 여러 형태로 변천 되어 왔다.

- 초창기 제대 :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제대의 형태는 식탁, 무덤, 그리고 제대라는 독특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식탁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제대의 출발점은 성 목요일 이층방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예수께서 새롭고도 놀라운 의미를 부여하신 유일한 파스카 만찬이 거행된 것은 바로 나무로 만든 식탁에서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개인집에서 계속해서 성찬례를 거행하였으며 성찬례를 거행한 것과 친교의 식사를 연결시켰다. 초기시대까지만 해도 제대는 전례 용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식탁 중의 한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식탁 주위에서 신자들은 아가페 음식을 먹었으며, 그 식탁에서 주교는 사제들과 함께 성체를 축성하였다.

이처럼 초기시대에는 이교인들을 이해시킬만한 참되고 고유한 제대가 없었다. 때문에 이교인들은 제사용 식탁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즉시 아가페 식사와 구분해서 성찬 신비가 더 강조됨으로써 축성 예식은 고유한 식탁에서 거행되었다. 그 고유 식탁은 사도 바오로가 언급한 것처럼 『주님의 식탁』(Mensa Domini)이라 불렸는데 아마도 귀족 집안에 있는 가구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다리가 3개로 된 그런 식탁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부제들은 적절한 순간에 그 식탁을 지정된 장소에 배치하여 그 위에 빵과 포도주를 올려놓았으며 주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였다.

초기의 성찬 아가페 식탁에서 발전한 3세기의 제대는 원이나 사각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재질은 목재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나무 제대들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4세기말부터 나무로 만든 제대가 적지 않게 불편하다는 것이 제시되면서 점차적으로 돌로 대치되었다.

- 순교자의 유해와 관련된 고정된 석제(石制) 제대 :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출현으로 제대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면서 3가지 주요한 성격을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 나무 제대는 사라지고 견고한 재료인 돌이나 대리석, 값어치 있는 금속으로 제대를 이루게 되었다. 둘째로, 제대가 지면(땅)에 고정되었다. 셋째, 제대는 순교자들의 유해와 연결되었다.

제대에 대한 이러한 변화의 이유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음으로써 박해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어 옮겨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며, 또한 바실리카(Basilica) 건물도 처음부터 교회의 전례 집회를 위한 건물로 세워지게 됨으로써 회중의 중앙에 준비했던 나무 제대 대신에 바실리카의 토대를 쌓을 때 이미 제대를 돌로 만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 전체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라 여겼기에 이제 제대는 그리스도의 영적 건물을 상징하는 돌로 쌓아올린 건축 양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돌 제대를 가지는 관습은 곧 순교자들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제대 위의 한 부분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모셔 두거나 제대 안에 순서대로 모셔 놓은 값비싼 상자 안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