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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7) 유다의 입맞춤

입력일 2004-10-10 수정일 2004-10-10 발행일 2004-10-10 제 2418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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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죽음의 입맞춤
조토 디 본도네. 1302~1305년. 200×185cm.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의 프레스코 벽화. 유다는 노란 옷으로 예수님을 감싸고 입을 맞춘다. 예수님의 등 뒤에는 베드로가 보인다.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귀를 잘랐다고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했다는데, 이 기록은 마태오가 남겼다.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 가운데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보면 시커먼 망토를 걸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괴수들이 나온다. 이들을 디멘터라고 부르는데, 아즈카반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다. 디멘터는 「기억을 지우는 자」라는 뜻인 것 같다. 디멘터와 입술이 닿은 수감자들은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던 행복한 기억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만다. 괴수들이 좋은 추억을 빼앗아 삼키면 죄수들은 나쁜 기억만 남아서 고통의 늪에서 몸부림치게 되는데, 디멘터는 아무래도 드라큘라보다 나쁜 쪽으로 레벨업된 족속들로 보인다.

우리는 공공연히 입을 맞추는 관습이 없었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랜 입맞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령 고대 로마 시대에는 죽은 사람과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면서 이별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술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과 뺨을 맞대며 슬픔을 드러내거나, 막달레나가 죽은 라자로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파리에 여행을 갔다가 지하철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심지어 백주대로에서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다 말고 남들이 보든 말든 막무가내로 키스를 나누는 청춘남녀를 보고 공연히 쑥스러워 눈길을 피하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당대에 국제화가 되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예수님도 입맞춤의 추억이 있다. 베다니아에서 막달레나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신 적이 있고, 또 유다로부터도 입맞춤을 받았다. 막달레나는 죄를 짓고 나서 입을 맞추었고, 유다는 입을 맞춤으로써 죄를 지었다는 점이 다르다. 유다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주 못된 사람이다. 예수님을 배반한 죄목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덕분에 「배반자」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최고의 욕설로 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반자」라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총이나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할 정도였다. 가령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대왕 루시퍼와 나란히 동격으로 앉아 있는 악의 괴수가 다름 아닌 유다인 것만 보아도 배반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태초에 처음으로 죄를 지어서 우리 모두에게 유죄판결 받게 한 아담이 가장 나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로마서 5, 18), 아담은 슬쩍 눈감아주고 유다만 썩은 고기 취급하는 것이 좀 특이하기도 하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조토가 그린 「유다의 입맞춤」이다. 조토는 미술 역사에서 「미술의 혀를 풀어주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화가이다. 미술사학자 뵐플린이 그런 평가를 내렸다. 고대의 시인들은 그림이란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벙어리 예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화의 혀가 풀리고 굳었던 턱이 움직여서 말문이 틔었다니 조토의 그림 솜씨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조토 이후 르네상스 미술은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토의 그림을 보면 입발린 말주변을 뽐내기보다 간결한 어휘로 뱉어내는 소박한 말투가 심금을 흔든다.

「유다의 입맞춤」은 여러 복음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잠든 제자들을 깨워서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때 경비병들과 무장을 갖춘 한 떼의 군인들이 등불과 횃불을 들고 다가왔는데(요한 18, 3), 이들은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로서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다(마태오 26, 47).

유다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입을 맞춘다. 그렇게 하기로 군인들과 약속을 해 두었던 것이다. 유다에게는 배신의 입맞춤이요, 예수님께는 수난을 예고하는 죽음의 입맞춤이었다. 조토의 그림에서 유다는 아주 흉악한 인상을 가진 전형적인 악당 유형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유다는 왜 하필 입맞춤을 신호로 삼았을까? 그 당시 입맞춤은 흔한 인사 형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눈인사 정도하고 비슷하다. 그런데 올리브 산에서 일어난 그날의 사건 시점은 어두운 밤이었다고 한다. 또 으슥한 산중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기척이 잘 분간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산에서 캠핑을 하다보면 캄캄한 밤에는 아는 사람끼리도 지척에서 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랬으니 유다를 따라온 무리들이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체포하는 낭패를 저지를 수도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이 『내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요』하면서 대신 나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다의 입맞춤은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해준다.

또 이런 것도 궁금하다. 유다는 예수님의 온갖 기적과 행적을 따라다니면서 다 목격했으니,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예언자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다는 더구나 머리도 명석하고 매사가 딱 부러져서 회계 담당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그랬으니, 자신이 저지를 죄악의 무게와 배반의 대가가 은전 몇 냥의 가치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순전히 돈 욕심에 천하에 몹쓸 일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 아닐까? 예수님은 그날 밤의 비극이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라고 유다의 입맞춤과 배반행위를 설명하신다. 또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넘기셨다고 중언부언한다. 유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긴 뒤, 크게 뉘우친다. 그리고 대사제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고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했으니,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한다(마태오 27, 4).

그의 뉘우침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너희 가운데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저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불안하게 되물었던 제자들처럼 얼굴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다를 상종 못할 인간 말종으로 취급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