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삶 나의 신앙 - 이돈명 (10·끝) 통일에 남은 혼을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8-29 수정일 2004-08-29 발행일 2004-08-29 제 241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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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총장때 예산공개 등 개혁
생의 마지막까지 구원계획 동참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후 그해 가을 북한을 방문한 필자(가운데). 뒤로 평양 순안공항이 보인다.
시대의 조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곳이 대개 상아탑이다. 대학가에 몰아닥친 학원민주화 바람도 자유와 정의, 진리에 먼저 눈뜬 이들의 세상을 향한 외침이자 선구자적인 걸음이었던 셈이다. 주위의 기대 속에 1988년 9월 조선대 총장으로 취임한 즉시 개혁에 나섰다. 학교정상화에 걸림돌이 된 비리교수들에 대한 인사조치를 비롯해 특별채용으로 이뤄지던 교수인사제도도 공개채용으로 바꾸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하나둘 실천에 옮겨나갔다. 이듬해 새학기에 들어서는 전국 대학 최초로 예산을 공개하는 등 공개행정의 원칙도 다져나갔다. 음습한 곳에서 비리가 싹튼다는 생각에서였다.

늘 열려져 있는 총장실은 종종 격렬한 토론의 장이 되곤 했다. 이러는 1년 사이에 학원민주화의 초석을 마련하게 됐지만 이런 내 모습이 아직 독재의 그늘을 떨어내지 못하고 있던 문교당국에는 눈엣가시같은 존재로 비쳤던 모양이다. 억지로 꿰어 맞춘 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된 것이다.

무려 4년을 끈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됐지만 이 일을 경험하며 새삼 가난한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게 됐다. 충분히 지니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모르는 탐욕이 또 다른 탐욕을 낳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죄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학교에서 보낸 3년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또 다른 은총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때로는 격렬한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용히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 날 놓아두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1995∼96)으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이사장(2001∼2003)으로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우고 있다. 지금도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누가 「이건 당신 몫이요」하고 청해오면 피하지 못하는 게 어리석은 내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남은 혼을 모두 쏟아내놓고 싶은 일이 하나있다. 바로 이 땅의 통일을 위한 기초를 놓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그해 가을 북한을 오가며 품게 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누군가 먼저 용서하고 뛰어넘지 않고서는 참다운 민족화해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에 젊은이들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고단한 역사의 길을 걸어오며 숱한 오해와 편견에 젖어온, 그래서 자신도 몰래 역사의 흐름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 기성세대들을 뛰어넘어 새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이들은 물들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인 것이다. 이런 생각에 조선대 시절의 힘든 기억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학내분규를 겪었던 상지대학교 관선이사장으로 일하였는지도 모른다.

여든을 넘긴 지금 나는 또 다른 의미의 하느님과 만나고 있다. 하느님과의 첫 만남이 정의를 향한 길에서였다면 지금은 어린 종의 마음으로 내 안으로부터 들려오는 당신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분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지금껏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오는 여정에 수많은 이들이 턱없이 모자라는 내 그릇을 채워주고 감내하기 힘든 십자가를 함께 져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가운데 먼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내 길을 지켜봐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하기 힘들다. 앞서 길을 닦고 걸어간 그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내가 크게 어긋나지 않고 하느님께로 한발한발 다가설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게 되는 요즘이다.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한 내 삶에서조차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생을 다하는 날까지 당신의 구원계획을 함께 나눠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