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삶 나의 신앙 - 이돈명 (9) 정의평화위원회 활동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8-22 수정일 2004-08-22 발행일 2004-08-22 제 241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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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타도 위한 민주화투쟁 나서
첫 인권변호사모임 만들어 활동
1987년 중국방문 때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가운데가 필자)
내가 출소한 1987년 5월 한반도는 온통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여진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출감하자마자 정의평화위원회 회장으로 고문조작 은폐사건의 진실규명에 나서는 한편 5월 7일 발족된 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로 반독재투쟁 대열에 합류했다.

5월 18일 밤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6.10항쟁의 불길이 실질적으로 점화된 날이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5.18광주항쟁 희생자 추모미사가 끝난 후 김승훈 신부가 발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는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 때 나이 예순다섯,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 틈에 끼어 눈물콧물을 흘리며 뛰어다니던 내 가슴은 터질 듯 벅찼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의 물결이 넘쳐난 명동으로 출근하며 대열에 함께 했다.

78년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해 예순이 되던 81년부터는 감사로, 86년부터는 회장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교회의 모습을 봐오던 나는 평생 꿈꿔왔던 민주화의 현장,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을 잠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내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승리의 기쁨에 취해 집권연장의 야욕을 숨긴 독재권력의 술수까지 꿰뚫어보지는 못했다. 나는 그해 12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온힘을 쏟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앞까지 다가왔던 민주정권 수립의 꿈을 뒤로 미뤄야 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깊은 애정을 쏟았던 정평위 활동도 접어야 했다. 주교회의가 가을 정기총회에서 당시 정평위 규약을 무시한 채 정평위원들과 상의 없이 위원장을 주교가 맡도록 하는 한편 임원들의 임기가 만료되자 후임 발령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선뜻 주교단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수십년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보루가 되어왔던 정평위는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정평위에서 손을 뗀 후 이듬해 유현석 황인철 변호사 등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을 만들어 오늘까지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의지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애써왔다.

이 시기 사회적으로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흐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는데 차세대 인권변호사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우리 활동을 지켜봐 온 조영래 최병모 박원순 등 소위 2세대 인권변호사들이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매일같이 터지던 대형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방안을 찾다 85년 5월 내 제안으로 「정의실천법조인회」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인권변호사 조직을 만든 것이다.

정법회는 6월항쟁 당시 민주화운동 지도부라 할 수 있는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서 시위에 동참할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 정법회는 이석태 조용환 변호사 등이 중심이 된 3세대 인권변호사들이 만든 「청년변호사회」와 통합해 88년 5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정법회와 민변으로 이어진 인권변호사들의 활동은 합법적인 투쟁으로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반석을 제공한 셈이다.

이들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던 88년 1월,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조선대학교 대학자치운영협의회 임원들이었는데 당시 학내 분규를 겪고 있던 학교의 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몇 차례나 고사했으나 간곡한 부탁을 끝내 꺾지 못해 하느님이 허락하신 마지막 봉사거니 생각하고 그 해 9월 조선대에 부임해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게 됐다.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