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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4) 부자와 라자로

입력일 2004-08-15 수정일 2004-08-15 발행일 2004-08-15 제 2411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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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 살때 참 행복 느껴”
어디선가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가운데 빈부격차가 최고라는 통계를 읽은 적이 있다. 떼돈 들여서 자식들 줄줄이 조기유학 보내고는 기러기 아빠의 애환 운운하는 거야 그런대로 봐 준다 쳐도, 해외 골프원정이랍시고 동남아 캐디들 성희롱하다 나라 망신시키는 코리언 기사를 읽을 때면 한 번 만나서 골프채로 이마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기분 심란할 때 읽기 좋은 것이 바로 루가의 복음서다. 루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무척 각별했던 것 같다. 가령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 21).

이런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통쾌한 발언이다. 그 당시 부자들이 이런 말 듣고 내심 뜨끔했을 텐데, 이러다 루가가 있는 사람들한테 따돌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워진다. 루가는 마리의 노래에서도 일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손을 들어준다.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 53).

가사가 참 좋다. 그런데 여기서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esurientes implevit bonis)는 말은 「맛 나는 먹을 것으로 포식을 시키신다」는 뜻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주신다」, 또는 「재물을 넉넉히 베풀어서 살림살이가 활짝 펴지게 도와주신다」라는 뜻이다. 또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divites dimisit inanes)라는 번역도 표현이 너무 완곡하다. 「부자들은 빈털터리로 만들어 쫓아내신다」로 고쳐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어쨌든 루가가 개인적으로 가난에 무슨 한 맺힌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가난한 사람을 늘 가엾게 여기고 부자들은 왠지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보다 루가의 속마음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을 하나만 더 꼽으라면 그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그림은 독일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오토 시대의 하인리히 3세의 에히터나흐 필사본 그림이다. 성서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삼 층짜리 그림 띠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위로부터 한 칸씩 내려가면서 읽으면 된다. 맨 위 그림은 부자가 식탁이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즐기고, 문밖에서 라자로가 음식 부스러기가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고대하는 장면이다.

라자로는 온몸에 종기가 난 거지였다. 부잣집 대문간에 「사람들이 들어다놓았다」(qui iacebat. 루가 16, 20)고 하니까 추측컨대 풍이 심하게 들어서 운신이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한편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루가 16, 19). 그러니까 로마 시대 원조 웰빙족쯤 되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부자가 입은 「화사하고 값비싼 옷」(purpura et bysso)은 「자홍색 겉옷과 고급삼베로 짠 속옷」인데, 자홍색 겉옷은 예로부터 그리고 로마 시대에 황제와 일가 귀족들의 특권이었고 (판관기 8, 26과 창세기 49, 10) 고급삼베는 이집트 수입직물로 지은 사제의 옷감(batistes. 출애굽 25, 4와 28, 5)이니까 옷차림만 봐도 주인의 신분을 대강 짐작할 만하다.

필사본 그림에서 둘째 계단은 라자로가 죽고 그의 영혼을 천사들이 인도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라자로는 마치 어머니 품에 기어든 아기처럼 편안해 보인다. 말이 좋아서 천사의 인도를 받았다지만, 장례식도 못 치르고 어디 외진 곳에 버려져서 까마귀밥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필사본의 마지막 계단에는 부자의 임종 장면이 보인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곧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렸다.

루가의 비유 이야기는 줄거리 설정이 무척 자극적이다. 부자와 거지라는 신분 대립도 그렇지만, 생전과 사후에 두 사람의 운명이 180도 바뀐다는 극적인 뒤집기도 너무 작위적인 연출의 냄새가 풍긴다. 게다가 줄거리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루가에 따르면 라자로가 천국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생전에 가난하고 굶주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꼭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난했던 것도 천성이 게으르거나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너무 앞뒤가 생략되어 있어서 성서를 읽다가도 얼떨떨할 지경이다. 그러나 루가의 관심사는 라자로보다 부자에게 있는 것 같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 결말도 너무 전형적이다. 대관절 비유의 속뜻은 무엇일까? 루가는 비유를 통해서 부의 소유자로서 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부를 소유하고 누리는 방법에 대한 경고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옛날 옛적에 부자와 거지가 살았는데, 제각기 지옥과 천국으로 갔다는 플롯의 설정은 권선징악이나 사람 팔자 돌고 돈다는 식의 뻔한 상투적인 내용을 넘어서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가리켜보인다. 그것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혼자서 끌어안고 짊어지는 삶보다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더불어 나누는 삶이 가치 있다는 그런 교훈.

담장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행복의 나라에 안주하고 만 것,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즐기느라 식탁 아래의 그늘진 풍경을 살피지 않은 것, 이처럼 자신의 삶과 세계 바깥의 다른 삶과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는 점에서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누구에게도 무관심한 부자라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무심했을 게 뻔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대로 행복해. 하느님? 웃기지 말라고 그래!』 하면서 콧방귀를 뀌었을 테니까.

부자는 비록 죽은 뒤였지만, 또 다른 세계, 홀로 행복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자각이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깨우친 부자는 살아 있는 제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라자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제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형제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을 보면 부자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비유의 칼날이 뿜어내는 부드럽고 오싹한 냉기를 실감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성품을 지닌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의 고통과 아픔을 못 본 척 지나친다는 점 하나만 빼놓으면 서로 마음 터놓고 평생 친구로 사귀고 싶은 그런 인간미 넘치는 부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에히터나흐 필사본. 1030년경. 446×310㎜. 뉘른베르크 게르만 박물관. 라자로는 그리스어로 「도움 받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이름으로 쓰면 엘사자르 또는 엘리제르가 되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하느님이 도우신다」(El-azar)는 뜻이 된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pater)라고 부른다. 또 아브라함은 부자를 아들아(fili)라고 부른다. 더구나 부자와 그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섬긴다는 대목을 보면 부자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루가 16, 2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