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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앙 - 이돈명 (6) 3.1민주구국선언과 오원춘 사건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8-01 수정일 2004-08-01 발행일 2004-08-01 제 2409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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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윤보선 정일형등 참석
암흑에 빠진 민주주의 일깨워
80년대말 한 민주화 관련 기념행사에 참가한 필자. 좌로 김영삼 전대통령과 고 함석현옹, 우로 고 김승훈 신부 등이 보인다.
내가 맞닥뜨렸던 무수한 사건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들의 처절한 저항의 역사에 닿아 있다. 사건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몇 사건만 추려 소개해야 할 것 같다.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3.1절 기념미사는 내 생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미사에 이어진 신.구합동기도회에서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돼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로 깊은 암흑에 빠져있던 민주주의를 깨우기 위해 이뤄진 구국선언에는 함세웅 김승훈 신부를 비롯해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던 함석헌옹, 윤보선 전대통령, 김대중씨, 정일형 박사 등 이 땅의 지성인들이 거의 망라되다시피 했다.

이로 인해 법정에서의 공방은 수시로 휴정을 반복하면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법정 투쟁은 국민을 폭력으로 억누르지 않으면 잠시도 지탱할 수 없는 정권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재판과정은 내외신 언론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한번은 재판을 취재하고 있던 기자에게 『한 자도 실리지 않는데 뭘 취재하냐』고 했더니 『민주주의라는 연극을 보는데 여기만큼 좋은데가 있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는 말이었다. 재판이라는 허울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마저도 무시하려는 의도가 점점 명확해져 급기야 27명의 변호인단 전원이 총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유지에 협조할 수 없다는 항의의 뜻에서였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도 강론을 통해 피고인들의 진실에 신뢰를 표명하셨고, 구속자를 위한 미사와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잇따랐다. 나는 성직자들과 함께 했던 이 재판을 통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 곧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길임을 체득해가고 있었다.

이러는 가운데 79년 8월 정평위에 안동교구로부터 인권변론 요청이 들어왔다. 오원춘이라는 신자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변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경북 영양군 청기 가톨릭농민회 회장이던 오씨는 군에서 농민들에게 공급한 감자가 싹도 트지 않아 농사를 망치자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끈질긴 투쟁을 벌여 보상비를 받아낸 바 있었다. 이 때문에 당국에서는 오씨로 인해 모든 피해농가가 들고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전에 차단할 궁리를 하다 오씨를 불법연행해 폭행한 뒤 상처가 나을 때까지 보름간이나 울릉도에 격리시켜버렸다. 안동교구에서는 오씨 납치사건이 인권유린일 뿐 아니라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이라 여겨 대책위를 구성해 범교구 차원에서 대응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안동 목성동성당에서 열린 「교권 및 신앙자유 수호를 위한 기도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성당에서 기도회가 열리자 오원춘 사건은 전국적인 사건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부당한 공권력에 맞선 오씨의 기개에 감동한 나는 전력을 다해 재판에 임했다. 당시 안동교구장이시던 두봉 주교님과도 밤을 새워가며 대책을 논의했다. 김추기경이 정국과 관련해 청와대에 다녀오신 날이면 추기경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할 때도 있었다. 8월 2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의평화를 위한 기도회」에는 김추기경을 비롯해 윤공희 대주교, 지학순 주교 등 8명의 주교단을 비롯해 전국에서 모인 300여명의 신부와 500명이 넘는 수도자 등 수천명의 신자들이 함께 해 인권을 유린하는 제도의 철폐를 요구하는 등 전교회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씨는 재판에서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건의 내막을 밝히지 않은 체 입을 다물어버렸다. 참으로 허탈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함께 변론을 맡았던 황인철 변호사는 대구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엉엉 목놓아 울어버렸다. 부도덕한 정권의 실체가 드러날 판이었는데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80년대말 한 민주화 관련 기념행사에 참가한 필자. 좌로 김영삼 전대통령과 고 함석헌옹,우로 고 김승훈 신부 등이 보인다.

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