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삶 나의 신앙 - 이돈명 (4) 판사에서 변호사로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7-18 수정일 2004-07-18 발행일 2004-07-18 제 240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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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부세력에 “나쁜 놈들” 정면도전
경제적 이유 겹쳐 변호사 사무실 열어
법관재직시절, 법복착복기념으로 찍은 사진.
1961년은 한국현대사는 물론 내 삶에도 분수령이 된 해였다. 5.16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자 그 입김은 내게도 미쳤다. 62년 서울고등법원으로 옮긴 후 사건기록들과 씨름하고 있는데 하루는 군 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판사들을 회유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유화책의 일환이었다. 그 장교와 술자리를 같이하다 술김에 『그게 무슨 혁명이냐, 말도 안 된다. 네 놈들은 나쁜 놈들이다』며 5.16 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말을 했다. 나중에 들으니 하도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만 없었으면 권총으로 나를 쏴버리고 싶었더라는 것이다. 이 군인이 나중에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씨였는데, 그는 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63년 서울지법 합의부 재판장으로 승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늘 아들 걱정이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가장이 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판사의 수입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살림을 그나마 아버지가 뒤에서 도와주셔서 유지가 가능했는데 이제는 가족들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만 것이다. 결국 변호사로 전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로서는 막막한 상황 앞에서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법원의 독립성이 침해당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이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던 평소의 마음도 이 결정을 하는데 한몫을 했다.

63년 10월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면서 나는 한가지 원칙을 세웠다. 승소 가능성이 있는 사건만 맡겠다는 것이었다. 민.형사를 막론하고 반인륜적이고 반도덕적인 사건은 아예 맡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변호사가 된 지 2년쯤 지났을 때 내게 판사의 길을 열어준 김제형 변호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왔다. 동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삼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을 때 서울지방법원장으로 있던 그는 법관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다 법복을 벗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엔 변호사들이 동업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기에 고민을 하다 이왕 같이 일을 할 바엔 뜻있는 이들을 모아 의미있는 합동변호사 사무실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역제안을 했다. 김변호사도 대찬성이어서 나는 당시 형사지법과 민사지법에서 부장판사로 있던 유현석과 이동신을 떠올렸다. 그들을 만나 우리나라에도 올바른 법률서비스와 법률문화를 대중화할 새로운 형태의 실질적인 합동법률사무소가 필요하다고 설득해 드디어 66년 4월 7일 공동수임, 공동수행, 공동수입,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한 「제일합동법률사무소」를 열게 됐다. 아직 국내에 로펌이 시도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것도 파격적인 공동수임.분배를 원칙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성실함에 투철한 정의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훗날 내가 인권변호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또한 제일합동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지 10년째 되던 1972년 10월 유신체제 선포 소식이 전해져왔다. 예상했던 대로 긴급조치가 잇따라 선포되고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금지한 긴급조치 1호로 정국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정신까지는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74년 4월 3일 민청학련과 관련된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됐다.

「정당한 사유없는 결석이나 시험거부」에 대해서도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 어처구니없는 조치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던 이 때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