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나의 삶 나의 신앙 - 이돈명 (1)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남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6-27 수정일 2004-06-27 발행일 2004-06-27 제 240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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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기 급변하는 세상에 
서당에서 공부하다 소학교로
1936년 2월 24일 다시소학교 졸업기념 촬영에서(두번째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필자).
「하늘은 어떻게 당신 사람을 내시고 어떻게 이끄시는가」

내 나이 이제 여든하고도 셋, 그 가운데 적잖은 세월을 주님 속에서 때로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한 때는 속을 태우며 살아왔건만 이 물음만큼 답을 구하기 어려운 질문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 80여 삶처럼 책과 씨름하며 지내고 있는 요즘도 내 뇌리에는 어떻게 주님께서 나같은 이를 부르셨을까 하는 의문이 맴돌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리움을 받는, 태초로부터 하느님께 선택받은 존재라는 깨달음에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돈명이 할아버지」. 지인들 가운데서 「돈명」이라는 불리움이 정겹기만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할아버지」라는 수식어마저 붙고 보니 세월의 흐름에 이런저런 감회가 스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별난 것도 없는 내 삶을 소개하겠다는 제안이 내가 마지막까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떠올리게 해준 것 또한 감사할 일이 아닐까 싶을 뿐이다. 자연인 「이돈명」의 삶이 혼자만의 그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씨줄과 만남이라는 날줄로 얽힌 숱한 인연의 어우러짐 속에 함께 해온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 얽힌 삶 속에 감사드려야 할 것에는 깊이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미처 돌아보지 못해 상처를 입힌 부분에는 용서를 빌어야 할 모양이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어쩌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함께 역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왔던 이들에 대한 회상이고 시대의 아픔에 관한 기억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런 얘기가 나의 부질없는 회한이나 변명의 장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다만 이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만남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사랑하는 지인들이 즐겨 부르는 「촌놈」 이돈명은 1922년 음력 8월 21일 전남 나주군 문평면 운봉리 회두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연세가 서른여덟이었으니 늦둥이였던 셈이다. 위아래로 누이만 여섯이었으니 부모님들과 일가 친척들의 사랑은 가히 짐작할 만했다.

근검함으로 어렵게 소작농을 면해 살림을 키워오셨던 아버지는 자식을 가르쳐서 출세시킬 생각을 전혀 않으셨던 것 같다. 유난히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셨던 아버지는 나라마저 일본에 빼앗기자 외아들이 세상에 나가 화를 당하느니 그저 촌에 틀어박혀 농사나 짓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들을 외지로 보내 공부시킬 생각도 아예 없으셨다.

어쩌다 농사꾼이 아닌 딴 길을 걸어오게 됐지만 농사꾼 같은 성실성과 책임감을 이어받으려 한평생 노력하며 살아왔으니 아버지의 뜻을 절반쯤은 따랐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학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당신 친구분이 훈장으로 있는 인근 마을 서당에 보내 한문 공부를 시키셨다. 그 스승 밑에서 6년 동안 천자문을 비롯해 명심보감, 소학, 사략, 통감 등을 배웠다. 그러는 가운데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이 변화를 깨달으셨는지 내가 12살이 되던 해 가을에서야 신식 학교에 보내셨다.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문평소학교 3학년에 편입했는데 이듬해 일가친척의 도움으로 집에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다시소학교로 옮길 수 있었다. 조회나 행사 때 일본 국가를 불러야 할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그 때마다 입을 꾹 닫고 따라 부르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민족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은연중에 반일 감정이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1936년 소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근방에서 학교를 찾다 목포 상업학교에 지원하기로 했다.

이돈명 변호사(천주교인권위 이사장),정리=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