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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신앙 - 최재선 (9) 해외원조로의 전환

최재선(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 사무국장),정리=서상덕 기자
입력일 2004-06-13 수정일 2004-06-13 발행일 2004-06-13 제 2402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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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기만 해오다 나누는 교회로
해외원조결정 가장 기뻤던 때
1991년 로마에서 열린 제14차 국제 까리따스 세계총회에서 아시아대륙 대표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필자(왼쪽에서 두번째).
선진국교회 원조기구협의회(CIDSE)에 의하면 1970년대 한국교회에 대한 원조는 730개 사업에 미화 2300만 달러(당시 환율로 169억원)로 그 대부분이 인성회 설립 후인 70년대 중반 이후로 되어 있다.

해외원조 조정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관련 국제회의를 바쁘게 쫓아다녔다. 인성회 초기엔 유럽, 1980년대 전반기엔 아시아지역 원조 협력기구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실정과 요청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80년대 중반 한국이 지원대상국 명단에서 빠졌지만 인성회 설립 후 10년 동안 외국교회의 원조를 받으면서 해외원조에 대한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의 민간발전위원회가 주관하는 연수회와 국제 까리따스 세계총회, 아시아대륙 까리따스회의 등 많은 국제 회의와 훈련이 있었기에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훌륭한 분들과 함께 국제협력의 틀을 만들어나갔다.

국내에서는 산업화과정에서 고통과 희생의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 단체에 투신한 수많은 교회 일꾼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은총이었다. 그들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고 계신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몫은 그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외국교회로부터 원활히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아시아와 선진국 교회로부터 다양한 이론들을 담은 자료를 구해 제공했다. 이러한 역할과 함께 산발적으로 흩어진 여러 활동을 전국 차원으로 묶어주는 일, 전국 연수와 영성훈련 기회를 마련하는 일 등도 인성회가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인성회 초기부터 심혈을 기울여온 신자들의 이웃사랑 실천의식 교육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서서히 결실이 나타났고 교구 차원의 조직은 교회지도자들의 이해와 인식에 따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은 한국사회는 물론 교회에도 큰 변화의 시기였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한국교회 200주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 대형행사를 치르며 양적 팽창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교회사목 분야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전쟁 후 미국 원조기구의 긴급구호사업, 70년대 중반기까지의 자조개발사업, 이후 80년 중반기 이후까지의 사회운동의 뒤를 이어 외국 원조를 탈피해 국내자원만으로 가능한 사회복지 서비스가 주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회사목이 선진국형으로 변화된 것이다.

나는 이런 흐름을 보면서 사회사목의 대전환이 필요함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야 한다는 74년 마닐라에서 배운 원칙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여건은 성숙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제수준, 한국교회의 여력, 신자들의 이웃사랑 실천의식, 교구 차원의 사회사목 조직화, 사회운동의 퇴조 등은 대전환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징표였다. 특히 국제회의를 통해 표현된 저개발국 교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기대는 이 변화를 촉진하는 외부적 압력이었다. 받기만 해온 한국교회가 이제는 가진 바를 나누는 교회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 대전환의 구체적 방향이었다. 성령의 개입이 이 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관건이었다. 성령의 개입은 박석희 주교님의 취임과 주교회의가 91년 인성회 명칭을 사회복지위원회로 변경하는 조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이듬해 가을 주교회의가 한국교회의 공식적 해외원조 시작을 결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내 역할은 교구 대표자들이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고 이는 박석희 주교님의 결단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이 감격의 순간을 인성회의 설립, 사순절운동의 시작과 함께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때로 꼽는다.

최재선(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 사무국장),정리=서상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