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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늘 새땅]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를 가다

전대섭 기자
입력일 2004-04-18 수정일 2004-04-18 발행일 2004-03-28 제 2391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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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밟던 디딤돌 그 자리 그대로…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10여분. 성지 팻말을 보고 찾아간 곳엔 수녀원으로 사용되는 한옥 한 채와 성당, 식당, 때론 단체 순례객들의 잠자리로도 사용되는 임시 강당 한동이 조금은 쓸쓸하게 순례객을 맞는다. 수녀원 앞 성지광장 한켠에 이제 막 원형복구 작업을 끝낸 20평이 채 안되는 초가집 「주교관」을 둘러보고서야 이곳 성지의 진면목이 조금씩 느껴져온다.

초창기 한국천주교회 순교사에 관한 자료가 집대성되고 정리, 편찬된 곳. 다블뤼 안(安)주교가 제5대 조선교구장으로서 10여년간 사목활동 근거지로 삼았던 곳. 5명의 순교성인의 숨결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150여년 동안 신앙의 위대함을 증거하고 있는 곳.

「조선의 카타콤바」로도 불리는 신리공소(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번지)의 오늘날 모습은 그러나 이러한 교회사적 가치와 소중함에 비해 너무도 외롭게 그 작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찌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으랴.

한강이남 선교 근거지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와 페레올과 함께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 안(安)주교는 1857년 당시 제4대 조선교구장이던 베르뇌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서품되고, 그때부터 국내 여러 지방에서 조선교회사, 특히 순교사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이렇게 수집된 교회사료들은 이곳 신리에서 정리되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내졌다. 이 자료들이 「다블뤼 비망기」이며,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1, 2권이 바로 이 비망기를 바탕으로 편찬된 것이다.

또 안주교는 연풍 출신 황석두 루가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신리는 이처럼 한국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일뿐 아니라, 안주교가 10년 가까이 사목의 근거지로 삼았던 주교관이자 한강 이남 교회의 「교구청」이기도 했다.

신리를 중심으로 내포지방 선교에 나섰던 오메트르 오신부와 위앵 민신부는 수시로 신리로 안주교를 찾아와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앞으로의 진로를 상의했다.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닥칠 죽음을 직감하며 이곳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했으리라.

다블뤼 안주교와 오메트르, 위앵 신부와 황석두 루가는 1866년 3월 11일 신리에서 1km 떨어진 거더리에서 잡혀 3월 30일 충남 보령군 오촌면 영보리 갈매못 해변에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 또 한명의 성인은 바로 이 집의 주인인 손자선 토마스다. 그 역시 1866년 3월 12일 잡혀, 같은날 공주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 치명했다.

무명 순교자들

인근 합덕읍 대전리(大田里)엔 40여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다. 1972년 봄, 손자선 성인의 선산이던 이곳이 과수원으로 개발되는 와중에 연고자 없는 32기의 묘가 발굴됐다. 한결같이 분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과 묵주가 함께 나왔다. 이들 시신은 당시 신자들에 의해 1km 떨어진 공동묘지에 6개 봉분으로 이장됐다. 1985년 4월 2차 파묘때 14기의 무연고 묘가 또 발굴됐다. 『대전리에 있는 십수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口傳)이 있던터에 십자가와 함께 발굴된 이들 14기의 묘는 손씨와 치명한 가족의 묘로 여겨져 이장했다.

현재 신리성지엔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요청으로 2002년 2월부터 샬트르 성바오로회 서울관구 소속 권마리에따 수녀와 허공사가 수녀가 파견돼 활동중이다.

손토마스의 집은 원래 초가집 열칸으로 마을에서 최대 부호였다. 그러나 일가들이 거의 순교하고 집마저 다른이의 소유가 됐다. 1927년 4월,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신자들과 당시 합덕본당 7대 주임이던 페렝 백신부가 이 집을 사들였고, 1954년부터 뼈대는 둔채로 양철지붕을 얹어 공소로 사용해왔다. 64년에 천정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으나 40년간 방치되어오다 2003년 9월부터 안주교 당시의 초가집 복원작업에 들어가 오는 4월 기념성전 기공식과 함께 「주교관」 축복식도 가질 예정이다.

신리성지 인근 대전리에 있는 무명순교자들의 묘를 찾아 기도하고 있는 순례자들. 대전리 인근 야산에는 성 손자선 토마스 일가를 비롯해 모두 40여기의 무명순교자 묘가 있다.

■ 성지관리 권마리에따 수녀

“겉모습보다 순교정신 새겨봐야”

『비가 오면 밤새 양동이로 물을 퍼날랐어요. 화장실도 없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습니다. 이곳이 어떤 곳인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신리성지를 지키고 있는 권마리에따(73) 수녀는 2002년 2월 부임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핑 돈다』고 말한다.

『신리는 다섯분의 순교성인들이 사시던 곳이고, 치명 순교하신 곳입니다. 또 한국교회사와 순교사가 최초로 집필된 곳이고 안주교님의 사목근거지이기도 하지요. 이런 성지가 그토록 방치되어온 것이 이상할 따름입니다』

신리성지 보존과 개발을 위한 권수녀의 노력은 마치 「탁발」과도 같은 수행길이었다. 전국을 돌며 신리성지를 알리고, 도와달라며 호소했다. 당진군청을 찾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수차례 건의했다.

『순례객들도 대부분 성지에 오면 보잘것 없는 모습에 실망합니다. 하긴 기본적인 시설 조차 안돼 있었으니… 하지만 신리성지의 의미와 교회사적 가치를 알고는 모두들 감명을 받고 돌아가지요』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후원자들이 모였다. 그러나 신리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샬트르 성바오로회의 지원이 컸다. 동료수녀들이 후원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신리성지의 숙원은 기념성전 건립과 무명순교자 유해안치 작업이다. 「주교관」복원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마무리지은 상태. 그러나 성전건립엔 어려움이 많다. 지반이 갯벌이어서 공사비가 배로 들뿐 아니라 성전과 주교관을 「회랑」으로 연결시키는 계획이어서 비용이 만만치않다.

『회랑을 48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회랑 한 채당 3백만원 정도 든답니다. 계획된대로 모두 완성된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공간이 될텐데… 지금으로선 하느님께 기도할뿐입니다』

갈매못에서 살다가 다시 이곳 신리로 오게 된 것을 분명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이라고 믿는다는 권수녀는 『국내에서 가장 관리와 개발이 어려운 이곳, 신리성지를 위해서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진말 공소를 지키고 있는 권마리에따 수녀(왼쪽)와 허공사가 수녀.

공소를 지키고 있는 권마리에따 수녀(왼쪽)와 허공사가 수녀.

■ 신리성지 가는 길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예산방향 32번 국도를 타고 2km쯤 가다 서야중.고등학교 앞 사거리에서(주유소 있음) 고덕면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4km 정도 가면 신리성지 표지판이 보인다. 매주일 오후 2시 성지에서 미사가 있으며,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는 단체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봉헌할 수 있다.

※연락처=(041)363-1359, 011-9982-1359

※도움주실분=농협 481098-51-011189, 국민은행 484201-01-068266 사회복지법인 신리성지

♣ 바로잡습니다

3월 28일자 7면에 보도된 「조선의 카타콤바 - 신리성지를 가다」 기사 중 신리성지 전화번호는 지역번호가 043이 아닌 041이므로 바로잡습니다.
「순교복자기념비」앞에서 신리성지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권수녀. 뒤로 복원된 「주교관」초가집이 보인다. 「순교복자기념비」는 5위의 복자를 기념해 1969년 4월 세워졌다. 뒷면에 적힌 비문은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선친)이 직접 썼다.

전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