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비극의 땅에 희망을' 21세기 첫 독립국 동티모르를 가다 (하)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4-04-11 수정일 2004-04-11 발행일 2004-03-21 제 2390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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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 입을 것이 절대 부족한 나라 
50%만 취업…하루 1달러로 연명 
부모잃은 아이들은 길거리서 방황 
【동티모르 딜리, 로스팔로스=이승환 기자】 국제청소년지원단의 막내 손동욱(토마스 아퀴나스.14.대구대교구 경주 성동본당)군에게 친구가 생겼다. 돈보스코 수련센터에서 기숙하는 프란치스코(17)다. 두 나라 전통음식으로 식사를 나누고 오후 오라토리오(Oratorio 지역 청소년들에게 운동장과 시설을 개방해 농구 등 스포츠 오락 위주의 여가활동을 펼치는 것) 시간에는 축구도 했다. 짧은 영어로 프란치스코가 고향을 떠나 이곳 수련센터에서 생활하는 이유도 알게 됐다.

프란치스코의 할아버지는 1979년 인도네시아와의 독립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내전이 발생했던 1999년에 아버지는 독립파로, 삼촌은 반(反)독립파로 갈려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를 때리던 삼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프란치스코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프란치스코는 운이 좋은 편이다. 무료로 숙식을 해결하며 기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딜리시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지원단이 동티모르 제2도시 바우카우(Baucau)와 한국군이 주둔한 바 있는 로스팔로스(Lospalos)시로 가는 길. 길을 지나며 비춰진 동티모르의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길 여기저기에는 불탄 트럭과 버스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이따금씩 보이는 건물들은 대부분 불에 탄 채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맨발이었다. 오두막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다 무너질 것 같은 곳이 집이었다. 먹는 물을 구하지 못해 버려진 생수통에 남은 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한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동티모르의 인구는 현재 90여만명(추산). 일을 할 수 있는 청장년층 중 50%가 실업자다. 직업을 가진 이들도 대부분 하루 미화 1달러로 연명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20여년 간의 전쟁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다. 학교도 가지 못하고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은 영양부족과 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동티모르의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106명,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들에게 그나마 힘이 되는 건 살레시오회 등 가톨릭의 여러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와 기숙사다. 지원단의 숙소인 딜리시 돈보스코 수련센터, 그리고 1박2일 일정으로 방문한 로스팔로스 「돈보스코 소년의 집(Donbosco Boys Home)」등도 그 중 하나다.

소년의 집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110명이 살고 있다. 강당과 같은 공간에 간이침대를 놓은 것이 고작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천국과 같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이 동티모르에는 아직도 많다.

이곳을 담당하고 있는 마르코스(Marcos) 신부는 『지금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여건』이라며 『수도회 차원에서 힘을 쏟고 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소년의 집은 전화도 컴퓨터도 없다. 그나마 하나 있는 복사기도 한국군이 철수하며 기증한 것이다.

한국군 주둔 지역이어서 아이들은 『감사합니다』, 『안녕』 등의 한국말을 곧잘 한다. 『비바 꼬레아』를 외치며 지원단 일행을 마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해맑기 그지없다.

2월 29일 오전. 어떻게 열흘을 버틸까 생각했는데 막상 동티모르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이 앞선다. 동티모르 청소년들과 함께 보낸 날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저녁시간을 쪼개 「한글교실」을 열었다. 동티모르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묵주기도를 바쳤다. 손짓발짓 섞어 김치에 대해 설명하고 젓가락 잡는 법도 알려줬다.

바로 전날 동티모르 청소년들이 준비한 환송잔치는 두 나라 청소년들이 하나됨을 확인하는 자리. 『사랑해』를 연호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췄다. 이 때만큼은 전쟁도 가난도 병의 고통도 모두 잊었다.

이제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시간. 곳곳에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남은 헤어짐이라는 고통이 있을 때에만 다시 얻을 수 있는 것. 희망을 향한 첫걸음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그 첫걸음의 자리에 양국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있기에 그 희망은 더욱 크다.

『토도스 준토스 펠로 퓨처로 데 티모르(Todos juntos pelo futuro de Timor, 동티모르의 미래를 위해 모두 함께)』

공항에 세워진 커다란 입간판이 비행기에 오르는 일행을 환송한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례한 동티모르 신자들이 성당 마당까지 가득채웠다. 동티모르에서 가톨릭은 하나의 신앙을 넘어 국민 전체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구심점이다.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해도 매주일 성당은 신자들로 가득찬다.
국제청소년지원단이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 동티모르 청소년들이 준비한 환송잔치에서 양국 청소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랑해』를 외치면서 춤을 추고 있다

■ 취재후기

“굶어도 미사는 참례” 믿음으로 가난 이겨

마술리둔 공소에서 낯이 익은 아이를 재의 수요일인 2월 23일 오전 딜리 시내 성당에서 다시 만났다.

마을에서 본 것과는 달리 말끔한 옷차림이었다. 걸으면 두 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아이는 가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왔다고 한다. 택시비는 왕복 2달러(미화). 50센트가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던 아이였다. 「미사에 한 번 빠지면 두 달 동안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 아이러니다.

1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에 이날 4천여명의 신자가 찾아왔다. 성당 바깥에 마련된 의자뿐 아니라 마당도 신자들로 가득 찼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동티모르에서 가톨릭은 하나의 신앙을 넘어 국민 전체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구심점이다.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 못해도 매 주일 성당은 신자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믿음 하나로 전쟁과 가난과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

한때 동티모르에서 활발히 전개됐던 국제원조가 최근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국제 까리따스와 살레시오회 등 가톨릭 단체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살레시오 협력자로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낸 바 있는 비르질리오(Virgilio Dias Maecal?50)씨는 『하느님의 한 형제인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동티모르를 위해, 그리고 학교에 가지 못하고 병들어 죽어 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건물을 새로 지을 육중한 중장비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절실한 것은 평화를 위한 단 한번의 기도, 그리고 십시일반의 작은 정성이다.

※후원문의=(02)833-6006 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

※후원계좌=국민은행 758401-04-006021(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

제일은행 352-10-086122 (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

길을 지나며 비춰진 동티모르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이따금씩 보이는 건물들은 대부분 불에 탄 채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었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