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00·끝) 복자 마더 데레사 수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2-14 수정일 2003-12-14 발행일 2003-12-14 제 237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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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한평생
참 평화의 길 제시한 ‘사랑의 혁명가’
새 천년기 인류의 나아갈 방향 제시
2000년 대희년은 교회와 인류에 새로운 세상,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더욱 넘쳐나는 세상이 되기를 고대하는 인류의 염원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새 천년기를 맞는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막 문을 연 제삼천년기가 하느님의 참 평화가 지구촌을 가득 메우게 되기를 간절하게 염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시 인류는 끊이지 않는 갈등과 반목 속에서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눈 채 형제의 피를 흘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인류는 초강대국 미국의 심장부를 향한 초유의 항공기 테러에 직면하게 된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하릴 없이 무너져내린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전세계인들은 인간의 증오가 얼마나 참혹한 비극을 자아낼 수 있는지 너무도 또렷하게 목격했다.

이후 전세계는 테러와 대테러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를 공격해 이른바 세계의 경찰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려 했지만 결코 테러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조직적이고 대범한 테러 행위들이 세계 도처에서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오늘 세계에서 진정으로 평화는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더 위력적인 무력은 전쟁을 잠재우지 못하고 오히려 더 잦고 더 잔혹한 투쟁만을 불러오고 있다.

한평생 가장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던 마더 데레사는 1997년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3년 10월 19일 시복됐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참 평화는 오히려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빈민촌 한켠에서부터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10월 16일 바티칸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재위 25주년을 기념하는 미사가 거행됐다. 사흘뒤 바로 이 자리에서 교황은 이미 살아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을 거행했다.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시복은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교황은 30여만명의 순례자들이 모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오늘 하느님은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주셨다』며 마더 데레사의 시복을 선언했다. 시복식이 거행된 광장의 맨 앞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했던 그녀의 정신에 따라 3천여명의 빈민들이 초대돼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더 데레사의 뒤를 이어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니르말라 조쉬 수녀는 시복식에 즈음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은 바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그 말은 참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짓이기도 하다. 60억 인류의 가슴 속에는 참 평화에 대한 열망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은 참말이다.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전장에서조차 우리는 용서와 화해, 평화를 갈망한다. 서로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상대방의 진심을 읽을 수 있고 그러면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전쟁이 멈춘 순간이 없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인종, 종교, 민족과 이념에 따라,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익에 따라 반목과 갈등의 악순환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의 시복식은 더욱 인류에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결코 어떤 차이도 사람을 차별하거나 죽어가게 내버려둘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자신의 온 삶으로 웅변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제삼천년기 인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데레사 수녀의 거룩한 생애를 증거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데레사 수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그녀의 어머니 같은 사랑을 직접 경험한,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1996년 11월 23일 데레사 수녀가 심장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구경도 못하고 죽어가는데 왜 나는 이토록 극진한 간호를 받아야 하는가』

그는 죽음 앞에서 가난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고 안락한 병원 침대 위의 자신을 자책했다.

1910년 8월 27일 유고슬라비아의 한 알바니아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18살에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도회에 들어가 이듬해 인도 캘커타의 성모여자고등학교에 가서 2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세계 제2차 대전의 와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내몰리는 것을 보면서 담 너머의 가난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촌으로 들어갔고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얼굴」이다. 그가 돌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총부리를 겨눌 때 그것은 곧 하느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창으로 찌르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더 위력적이고 큰 대포나 폭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사랑의 혁명」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제삼천년기 인류의 미래는 그리스도의 참평화를 가져오는 바로 이러한 「혁명적 사랑」을 통해서만 밝게 열릴 것임을 데레사 수녀는 지금도 우리에게 일러준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