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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정의채 신부 (5)

정의채 신부(서울대교구·서강대 석좌교수),,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2-14 수정일 2003-12-14 발행일 2003-12-14 제 2377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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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믿어라’ 말보다 문화적 접근이 더 효과적
교회, 지성세계에 관심 기울여야
학문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것은 학문의 근본적인 직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신학생 때부터 나는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선교사들을 보면서 『저들이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는데,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했었고 그런 상념은 선교사의 꿈을 품게 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의 열망은 사제 생활 내내 내 맘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열정이 곧 부산에서의 사목생활 기간 동안 끊임없이 선교의 큰 성과를 거둔 밑바탕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신도들의 저력이었다. 그들이 가진 힘과 잠재력을 일깨워줌으로써 능력이 극대화됐고 그것이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가톨릭교회가 사회에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영역에서도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한 여건이 미미했다. 거기서 나는 「지성의 세계」를 복음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지성인 교리반이었다. 아울러 나 스스로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그래서 1957년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러면 왜 하필 신학이 아닌 철학인가? 당시는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던 때였다. 나는 교회 밖, 사상 세계의 물줄기를 돌려야 한다는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토마스의 입장에서 존 듀이의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2000년 11월 23~25일 열린 세계 가톨릭 철학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필자(맨 왼쪽).
유학에서 돌아온 뒤 우리 지성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시 미국 문명이 지닌 한계가 인식되고 서구 사상의 본산인 유럽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중세 사상을 모르면 사상을 논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철학, 신학, 문학 등 그 모든 지성과 사상의 세계가 바로 가톨릭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사상을 모르고서는 사상을 논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미국 문명에 실망하기 시작한 지성인들은 이처럼 원천에 접촉할 것을 촉구하는 나의 메시지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지성계의 복음화는 이후 한국 가톨릭 지성과 사도직 활동의 밑거름이 됐다.

그로써 나는 신학생 때부터 품고 있던 꿈들을 실현시켜나갔다. 그것은 바로 「지성 세계의 선교」였다. 지성인들에게는 「믿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후 현대 사상에 매우 가깝게 접근했다. 「존재의 근거 문제」가 당시의 저서이다. 90년대 들어서 다시금 토마스로 돌아간다. 토마스는 영원성을 갖고 있다. 70년대 유럽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80년대는 유럽 중심을 이뤘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를 예측한 나는 「형이상학」을 저술했고 이 책은 11판이 넘게 나오면서 교회 안에서보다 오히려 밖에서 더 많은 각광을 받았다.

「중세철학사」가 나온 뒤 국내의 유수한 일간지와 잡지사들이 내게 원고를 청해왔다. 원천에 뿌리를 둔 글들은 일반 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토마스의 사상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바탕을 이뤘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도 토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미국은 30년대 대공황을 바로 이 「새로운 사태」가 제시한 방법을 통해 극복했다.

나는 토마스의 「신학대전」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한다. 신학대전은 하느님과 세계와 인간을 깊이 통찰해 그 본질과 존재를 유감없이 탐구한 인류의 보전(寶典)으로 이를 한국 사상계에 소개하는 것 자체가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학대전의 한국어 번역 출간 소식을 듣고 이 작업이 『그리스도교의 철학과 신학이 한국의 전통 사상과 만나 매우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것』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지성의 세계로 들어가자』 인류는 문화와 종교의 충돌을 만나게 된다. 동양과 서양의 충돌,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충돌, 서구의 중국과 인도 문화와의 충돌 등이 예견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이러한 충돌을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다.

동서양의 문화를 융합해 미래 인류 사회의 새로운 지침을 모색하는 것이 오늘날 학문의 목표이며 나의 목표이기도 하다. 앞으로 세계는 아시아에 주목할 것이며 아시아는 세계의 사상계를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은 한국이 될 것이다. 일본은 가톨릭이 미약하며 대만은 노쇠했다. 필리핀은 아시아라기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한국은 그러한 사상의 중심이 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지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토인 것도 사실이다. 행사와 외형 중심의 교회는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 뿌리는 바로 사상과 문화이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대중은 지성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지성의 세계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의채 신부(서울대교구·서강대 석좌교수),,정리=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