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서울대교구 정의채 신부 (2) 부산 사목시절

정의채 신부(서울대교구·서강대 석좌교수)
입력일 2003-11-23 수정일 2003-11-23 발행일 2003-11-23 제 2374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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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신자가정 방문…선교 열기 뜨거워
한번에 예비신자 2천명 모집
서대신동본당 초대주임 권요셉 신부(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신자들. 권신부 왼쪽이 필자.
나는 1925년 12월 27일 농촌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오산보통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뒤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얼마 안돼 신부가 되기를 권유받고 1940년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됐고 마침내 1949년 5월 8일 야밤에 수도원과 신학교가 폐쇄됐다. 신부들은 체포됐고 신학생들은 신학교에 연금됐다가 귀가 조치됐다. 이로써 8년간에 걸친 덕원신학교 생활은 끝장이 났다.

1950년 드디어 한국전쟁이 터졌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을 넘나드는 절대절명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피난생활을 하던 나는 부산 영도에서 머물면서 3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게 됐고 마침내 1953년 휴전과 더불어 서울에서 8월 22일 노기남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절대 한계 상황에 던져져 사선을 넘나들면서 나는 처음에는 사제가 되어 1년만이라도 사목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면서 1개월만, 더 급박해지자 1주일만, 죽음이 경각에 달리는 순간에는 사제가 되어 단 하루만, 즉 한 번만 미사를 봉헌하고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하루만이라는 기도는 50년이라는 시간으로 베풀어졌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이처럼 큰데 다른 사람에게야 얼마나 더 큰 것이겠는가. 나는 그저 『무한히 자비하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사제 수품 후 첫 임지는 부산 초량본당 보좌였다. 거기서 1년 반 남짓 사목 후 1955년 사순시기에 신설된 서대신동본당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1957년 7월 하순 로마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2년여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목활동에 임했다.

풋내기 보좌신부로서 당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보다도 예비신자 교리에 정성을 쏟아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은 일이었다.

서대신동 성당의 신자수는 당시 300~400명 정도였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신자집을 가정방문하는 일은 생소한 것이었다. 더욱이 전후의 북새통에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일일이 신자들을 방문해 그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희망을 주기 위해 애쓴 것이 신자들로부터 큰 신뢰와 호응을 불러왔고 그것은 전교의 큰 힘이 됐다. 신자들의 신심과 전교열이 하늘을 찔렀다. 더욱이 전후 피폐한 삶 속에서 헐벗음과 굶주림, 질병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알게 모르게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런 준비를 거쳐 약 3개월 후 예비신자 모집에 나섰다. 성과는 컸다. 1957년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약 2000여 명에 달하는 예비신자들이 몰려왔다. 그때 세례자는 많게는 1700명에 달했다.

당시만 해도 한 성당에서 보통 100여 명 정도가 세례를 받은 것을 고려할 때 이런 수치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의 한국 교회에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전쟁 당시 부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때 교회는 당시 사람들의 고통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서대신동본당에서 이처럼 많은 영세자가 나온 것은 시대적인 고통에 교회가 응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진정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기대에 응답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한다. 지금 우리의 상황 속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회가 참으로 사람들의 고통과 기대를 읽지 못한다면 교회의 메시지가 힘을 갖지 못할 것이다.

당시 또 한가지 색다른 일은 지성인 교리반 운영이었다. 일반인 예비신자들은 구름처럼 몰려오는데 사회 지도층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으면 모든 분야에서 교회의 입장과는 다른 사회가 형성되기 때문에 지성인 교리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지성인 교리반을 운영해 나름대로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법조계, 의학계, 학계 인사들과 중고등학교 교사들, 문인들의 교리반을 지도해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정의채 신부(서울대교구·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