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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토착화를 향해] (18) 아시아 각국의 토착화 현황 (3) 대만 교회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1-16 수정일 2003-11-16 발행일 2003-11-16 제 237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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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 통한 참된 지역교회 건설에 매진
교회 자양 계획.심포지엄 등 다각적 노력 펼쳐
신학.전례.영성.윤리를 중국 문화안에 융합
역사

대만의 천주교회는 1626년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건너온 스페인 도미니코회 수사 마르티네스와 동료 선교사 5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뒤 대만 북부에서 활동하면서 약 4500여명을 영세시켰으나 1642년에 스페인 수비대가 대만 남부를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군대에 패해 철수하면서 선교사들이 축출되고 복음 선포는 그후 200년 동안 중단되게 된다. 이로써 그전에 세례 받았던 원주민들의 역사적인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동안 수 차례의 선교사 파견이 있었으나 포교에 실패한 뒤 천진조약에 의한 개항으로 1859년 로마 포교성성의 명을 받은 선교사 사인즈가 남부의 고웅에 상륙해 200여년 전과 조금도 다름 없는 박해 속에서 어려운 선교활동을 벌인 끝에 대남에까지 선교 기반을 구축했다. 하지만 교세는 여전히 미미했으며 1895년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점령하면서부터 비로소 교회가 전에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됐다.

그후 약 40년 동안 신자수도 5배로 불어났다. 아모이 대목구 관할 아래 있던 대만 교구가 1913년에 독립해 대만 지목구로 분리됐고 1947년 1월에는 대만 지목구가 주일 교황 사절의 관구 하에서 주중 교황 공사 관할로 들어갔다. 1949년 대만 지목구가 고웅 지목구로 개칭되는 동시에 타이페이 지목구가 신설됐고 1950년에는 대중 지목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포교를 담당하게 됐다.

1948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건너온 후 대만에서의 복음 선포는 대략 두 시기로 나눠지는데, 195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는 대만 교회가 번영을 누린 시기로 이 때 중국 대륙에서 많은 교우들과 성직자들이 대만으로 넘어왔다. 정치 불안과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사회 구제 사업과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아 많은 사람들이 영세 입교했다. 이때 신자수는 30만명을 넘어서 그 절정에 달했다.

70년대를 넘어서면서 대만 교회는 쇠퇴기를 맞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종교 생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 대만 사회의 뿌리깊은 민간 신앙의 세력, 그리고 가톨릭 교회가 대만 사람들의 심성과 문화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도시화로 인해 신자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례가 발생했고 그 결과 신자수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대만 타이페이 박물관에 걸려있는 「중국 성인들」유화.

복음의 토착화

대만의 문화는 원주민 문화 외에 중국 대륙의 주류 문화와 연관되는 한(漢) 문화가 있다. 「토착화」라는 용어와 관련되는 개념은 이미 중국 대륙에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함께 도입됐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위빈 추기경으로서 그는 1941년 「중국 천주교 문화위원회」를 조직했고 「그리스도의 중국화, 중국의 그리스도화」를 주장했다.

사실 대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문화 적응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해왔고 이러한 활동들은 나중에 토착화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바탕이 됐다.

대만교회가 쇠퇴기로 접어드는 시기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시기에 대만 교회는 토착화 문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72년 교회의 토착화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적지 않은 성직자들이 이에 대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토착화에 대한 토론들을 보면, 우선 신학의 토착화 작업이 기본적으로 전체 교회가 공동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신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가장 구체적인 일상 삶 속으로 젖어들고 그럼으로써 토착화를 위한 작업이 절실하고 관심 있는 요소로 간주될 때, 그 지역에 가장 알맞은 신학적 반성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이때 신학자들은 특수한 대상과 문제를 뽑아 그것들을 연구하고 해답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토착화」는 신학 토착화를 포함해 교계 제도, 경제, 전례의 토착화를 모두 포괄한다.

교회의 토착화는 복음적 가르침의 토착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실제로 토착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대만 주교회의의 신앙교리위원회와 교리교육위원회는 이미 「새 교리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는 천주(天主)에 대한 명칭 문제나 그밖의 여러 가지 종교적인 주제들이 중국 문화와 역사적인 전통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참된 지역 교회의 건설

당시 성직자들이 복음의 토착화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또 다른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만교회가 쇠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할 때 국가 경제는 부흥기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경제 문제는 토착화에 있어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다. 대만 교회는 교회의 경제적 자립 문제가 토착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대만 주교단은 1974년 「교회 자양(自養) 계획 초안」을 발표하게 된다.

이 계획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대만 교회는 자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됐고 이는 교회 토착화 성공의 주요한 요소가 됐다.

대만 주교단은 1976년 「대만 지역교회 건설을 위한 초안」을 발표했다. 이 초안은 오랫동안 대만 교회의 지식인들이 추구해온 것으로 2만자에 달하는 긴 분량의 이 문헌에는 복음과 교회의 토착화에 대한 문제들을 이론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정리한 것이 담겨 있다.

이 문헌은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제1차 총회의 말을 인용해 『오늘날 아시아에서 복음을 선포하려면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진실하게 아시아 민중의 심성과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며 『복음 선포의 중요한 임무는 진정한 지역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 교회는 위빈 추기경과 루오쾅 대주교의 주도 아래 「제천경조」(祭天敬祖)의 전례 형태를 완성함으로써 전례의 토착화에 있어서 하나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도 각 본당과 공동체 안에서는 음력 설날마다 이 전례예식에 따라 조상 제사를 거행하고 있다.

대만교회는 지난 1983년 「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복음화에 대한 대규모 심포지엄을 기획했다. 5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8년 푸렌 대학에서 열린 이 심포지엄은 엿새 동안 230여명이 참석해 대만의 복음화 현실과 전망, 과제를 점검했다.

심포지엄을 마치면서 결의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역 교회의 건설과 복음화」였으며 복음의 토착화를 위한 다음의 방안들이 제시됐다.

즉 첫째, 교회는 적극적으로 신학, 철학, 전례, 영성, 윤리를 중국의 문화 안에 융합하고 대만 국민들의 전통적인 민속 절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교, 가톨릭계 대학, 그리고 학자들은 앞서 지적한 작업들을 책임 있게 연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셋째, 교회는 소수 민족들의 고통과 희망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 정신으로 그들의 문화를 고양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들 안에서 문화에 대한 개념이 이미 인문적 측면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심포지엄이 막을 내린 뒤 대만 교회 안에서는 복음의 상황화를 이루는 기초로서 기초 교회 공동체의 건립이 이어졌다.

신학과 영성의 토착화 노력

한편 대만 교회의 신학 토착화 작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토착화에 대한 논의는 먼저 신학의 토착화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러한 논의의 주체들이 대부분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교회 토착화가 보다 근본적인 주제인 것으로 파악됐으나 신학 토착화의 작업 역시 병행됐다. 신학의 토착화 방법론 외에 신학 토착화에 대한 몇 가지 책들이 발간됐다.

동시에 유교의 개념과 그리스도교의 개념들을 연구한 여러 저서들, 즉 유교의 인(仁)과 그리스도교의 사랑, 효에 관한 연구 등이 나와 전례의 토착화에 기여했다. 지역교회 건설과 기초 공동체에 대한 토론회가 푸렌 대학에서 세 차례에 걸쳐 열리기도 했다.

한편 영성의 토착화와 관련한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중국 그리스도교적 명상」 기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대개의 아시아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만 교회 역시 토착화를 통한 참된 지역교회의 건설은 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지역의 사회와 민족, 문화 안으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깊숙이 뿌리를 내릴 때 그리스도교 교회는 참된 지역 교회가 될 것이며 복음화의 과제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대만 교회의 토착화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만교회의 토착화와 관련되는 개념은 중국 대륙에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함께 도입됐다. 사진은 중국 본토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있는 모습.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