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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살리자] 어느 ‘기러기 아빠’의 죽음

이승환 기자
입력일 2003-11-16 수정일 2003-11-16 발행일 2003-11-16 제 237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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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교육열…가족·건강 다 잃을 수도
처자식에 버림받은 ‘ 펭귄 아빠’도 있어
가족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산교육 중요
교회서도 가족공동체의 깊은 유대 강조
얼마 전 딸과 아내를 캐나다로 보내고 혼자 지내온 40대 가장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받았던 그는 한 달에 400여 만원씩 들어가는 자녀 교육비에 큰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자식교육이 얼마나 중요했길래 목숨까지 잃었을까? 「기러기 아빠」의 죽음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물결에서 다양한 가정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과제로 남는다.

기러기 아빠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사교육비의 부담은 가정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부부의 오랜 별거는 가정 해체의 위기를 조장한다. 사회생활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가정과 가정 내 교육이 조기유학 바람으로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조기유학 열풍의 어두운 그림자를 짚어본다.

은행 중견간부인 이형국(바오로.43)씨. 그는 1년 전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짜리 아들을 캐나다 밴쿠버로 보냈다. 이씨 자신이 아이들의 유학을 강력히 권유했지만 막상 시간이 흐르면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퇴근을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어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고, 건강도 안 좋아졌다. 경제문제도 걱정이다. 6000만원대의 연봉은 대부분 캐나다로 송금하고 마이너스 통장으로 용돈을 해결하고 있다.

아이들과는 이메일로 대화하는 게 전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과연 아빠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 지 이씨는 못내 걱정된다. 이런 저런 스트레스로 이씨는 가끔 외도의 유혹까지 느낀다고 말한다.

정확히 정의된 바는 없지만 흔히 자녀를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사는 남자 층을 「기러기 아빠」라고 부른다. 새끼들을 키우는 데 헌신적인 것으로 유명한 기러기에 비유한 것이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해외 유학생 수는 17만 4천명이고 이중 10%인 1만 7천명은 고교생 이하의 어린 학생들로 주로 엄마와 함께 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2만 여명에 가까운 기러기 아빠가 이미 존재하고 그 수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직장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자녀들도 가정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시기. 이들은 왜 기러기 아빠가 되기를 자청했을까?

『누가 이 나이에 홀아비처럼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앞 뒤 꽉꽉 막힌 듯한 한국교육에 질식해 버리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한정엽 이냐시오.42.서울 대치동본당)

기러기 아빠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갈수록 확산되는 해외유학 붐과 한국의 공교육에 대한 실망, 그리고 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외 경제개방으로 영어가 중요한 직업능력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은 교육과 미래를 위해 택한 선택이 오히려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단절. 인터넷 무료전화나 이메일이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 유일한 통로이다 보니 가족간 진솔한 대화는 꿈도 꿀 수 없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며 사고방식이 바뀌고 외국문화를 흡수한 자녀들과 고국의 전통에 배인 가장의 문화차이의 골은 갈수록 깊어진다.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 7월 아내와 자녀를 캐나다로 유학 보낸 36세 남자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것을 알고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들 용돈이라도 벌고자 현지에서 골프장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는 그곳에서 만난 현지 거주 한인과 만나 한국의 남편과 이혼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기러기 아빠에 이어 아내와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가장을 지칭하는 「펭귄 아빠」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다. 자녀들을 위한 무리한 투자가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로 되돌아온 것이다.

자녀들이 이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회색인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중학교 때 캐나다로 가 대학까지 졸업한 K씨는 한국에 돌아왔지만 영어 하나 잘 하는 것으로 취업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유색인종이 그곳 주류사회에 편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미국 LA로 간 그는 한인타운에서 식당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10여년 가까이 유학비용을 지원해 주며 자식의 성공을 바랐던 부모와는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한국교육이 정상화되고 영어에 대한 획기적인 교육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기러기 아빠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기러기 아빠, 가족이라는 선택은 순전히 그 가정의 문제이고 자녀에 대한 애착이 유별난 한국문화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문제화해서 물리적으로 막을 방법을 찾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식사랑과 학업중심의 교육을 생각하기에 앞서 가정공동체와 그 안에서 이뤄지는 「산 교육」의 소중함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가정사목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교회 내 상담기관의 한 상담사는 『아이들의 교육에는 지식교육이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법과 나누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특히 기러기 아빠가 되는 시점이 자식들에게는 가장의 존재가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사춘기라는 점에서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가정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고, 사회 속에서 적절히 융화될 수 있는 사회구성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교회 문헌에서도 가정공동체의 구성과 가족관계의 중요성을 찾아볼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정공동체」 43항은 「가정 공동체의 성원들 사이의 관계는 각자의 인간적 존엄성을 가치의 유일한 기반으로서 존중하고 육성할 뿐 아니라, 진심으로 받아들임, 만남과 대화, 이해를 따지지 않는 협조 자세, 관대한 봉사, 깊은 유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곧 가정 내 성원들간의 진정하고 성숙한 일치를 육성하며 좀더 넓은 공동체관계를 위해서도 본보기와 자극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기러기 아빠들의 증가가 교회 사목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별거가족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사목 프로그램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부모 자녀간 갈등관리 워크숍, 부부 친밀감 향상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별거로 인한 가족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야 한다. 또 홀로 남아있는 배우자를 위한 프로그램 등을 통해 가족이 떨어져 있어도 그들의 가족애를 유지시킬 수 있는 관리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기러기 아빠의 양산이 보다 근본적인 한국 내 교육제도의 개혁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사회현상이라면 그 현상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 교육에 문제가 있다면 함께 나서서 고치려 노력하지 않고, 자신은 능력이 되니 그 시스템을 빠져 나와 개별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이기심에서 기러기 아빠 현상이 비롯된다」

「가족끼리 떨어져 있는 불행과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녀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는 기러기 가족들의 가족애를 왜 짓밟는가」

자녀사랑을 위한 부모의 희생인지 아니면 이기심에서 나온 일종의 도피인지, 「기러기 아빠의 죽음」을 놓고 갑론을박의 논쟁이 네티즌 사이에서 한창이다. 하지만 그 희생과 투자가 가정 자체를 잃어버리는 더 큰 희생을 불러오지는 않을지 보다 근본적인 것부터 생각해 볼 때다.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