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96) 남미 해방신학의 태동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1-16 수정일 2003-11-16 발행일 2003-11-16 제 2373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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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수탈서 인간 해방 추구
제도화된 폭력과 구조적 불의 상황
예언자적 소명으로 변혁 위해 노력
1960년대 후반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모든 억압과 수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신학으로서의 해방신학이 태동한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196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와 메데인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단 총회이다.

이른바 메데인 문헌으로 불리는 이 총회의 후속 문헌은 가난을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게 하지 않고 세상과 인간의 구원으로서 해방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을 촉구하면서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과 「구조적 불의」로 규정했다.

해방신학의 태동은 우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에서 오는 불의한 상황에 기인한다. 완강한 봉건제도와 중앙집권적 군주제에 바탕을 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무력을 앞세워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지배계급을 형성해 식민통치를 펴면서 민중들을 억압했다. 남미 여러 나라는 경제적 자원의 공급 기지가 됐고 지배자들은 강력한 군대 세력으로 조직됐으며 독재 체제가 구축됐다.

식민 통치는 남미 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지배 계층은 부정부패를 통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됐고 서구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집권층의 결탁으로 국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인 조건마저도 충족되지 못했다. 민중들은 지배층의 축재를 위한 착취의 수단일 뿐이었다.

남미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전시 특수로 호황을 누렸고 나름의 경제 발전도 급속하게 이뤄졌으며 외국 차관과 다국적 기업의 자본 도입으로 근대화를 꿈꿨으나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국민들의 빈곤은 더욱 악화됐으며 오히려 막대한 외채만을 짊어지고 말았다.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사회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러한 불의한 상황을 변혁하는데 투신하는 예언자적 소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본격적이고 공식적인 논의가 이뤄진 것이 바로 메데인 회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메데인 회의를 통해 드러난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남미 교회들의 입장은 이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안에 스며든 새로운 인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해방신학은 어느날 갑자기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무관하게 돌출된 것이 아니다.

해방신학의 출범에 결정적 동기를 부여한 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다. 특히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중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은 해방신학의 입장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해방신학은 당시 기득권자들의 강한 반발과 탄압을 불러왔다. 사진은 1980년 미사 중에 저격당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를 추모하고 있는 모습.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인류에 봉사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인간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떠났다. 공의회는 사목헌장 7항에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 천명했다. 공의회는 나아가 4항에서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줄 의무를 갖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교회의 사회 개혁을 위한 투신을 촉구했다.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다수 민중의 삶이 가난과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시대의 징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해방신학은 『불의한 사회체제 하에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소외된 계층들의 한 맺힌 고통의 실체를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 보려는 신학적 성찰』이었다.

이러한 예언자적 소명의 실천 노력은 당연히 당시 기득권자들의 강한 반발과 탄압을 불러왔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를 비롯한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희생이 수반됐다. 남미 해방신학은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남미 자체가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를 이루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와 휴고 아스만, 멕시코의 호세 미란다, 우루과이의 후안 루이스 세군도, 엘살바도르의 스페인 태생인 혼 소브리노 등이 그들이다.

해방신학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적인 입장은 1984년 8월 6일에 반포된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과 1986년 3월 22일 반포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 두 가지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오해하듯, 교회는 해방신학을 단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86년의 훈령은 『자유의 신장을 저해하고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여러 장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강렬한 해방의 열망이 일어나 우리들의 세계를 휩쓸고 있다』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러한 열망을 자신들의 열망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투신을 의도한 해방신학의 취지와 문제의식에 대해서 타당하다고 평가한다. 다만 그 의도와 목적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 즉 현실 분석과 극복의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신학에 도입한 점에 있어서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된 측면도 있다.

실천적 성격을 띤 해방신학은 그 실천방식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해방신학의 명분 아래 마르크스주의적 노선을 걷는 소수의 무리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순수한 복음적 해방신학자들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해방신학을 논하거나 비판할 때 그 조류들을 구분해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