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의 가르침 (48) 네스토리우스 / 노성기 신부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3-11-02 수정일 2003-11-02 발행일 2003-11-02 제 237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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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랑 충만
영성깊은 명 설교가

오늘은 터키의 에페소로 여행을 떠나자. 에페소 공의회(431)가 열렸던 도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인물은 네스토리우스이다. 그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천주의 모친)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하여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교육을 받은 수도사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자(427. 12), 후임 총대주교좌를 놓고 시데의 필립보와 프로클로스가 극한 대립을 보였다. 그러자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영성이 깊고 설교가로서 명성이 자자한 네스토리우스를 추천하여,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428. 4. 10).

그리스도의 인성 강조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천주의 모친)라고 부르기보다는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모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테오토코스」라는 칭호를 사용하려면, 「안트로포토코스」(사람의 모친)라는 칭호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412~444) 치릴루스가 이 문제에 개입하였다.

치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 문제에 개입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신학적인 전통에서 치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했고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위격이 지닌 신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반해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으나 그리스도 위격의 일치성인 신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신학적인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동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셋째, 「테오토코스」를 반대하는 네스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눈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넷째, 428년경에 4명의 알렉산드리아 성직자들이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피신와서, 치릴루스가 자신들에게 부당한 처사를 했다고 고발하자 황제는 이 사건을 네스토리우스에게 처리하라고 위임했다. 그런데 치릴루스는 갑자기 세력이 커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감히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의 행동에 대해 재판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처럼 신학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가 결부되어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이 발생했다.

에페소 공의회서 단죄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다. 며칠 뒤에 안티오키아의 요한 일행이 뒤늦게 에페소에 도착하여, 또 다른 대립공의회를 소집하여 치릴루스와 에페소의 주교 멤논을 단죄했다. 그러자 교황사절단은 안티오키아의 주교 요한과 지지자들을 단죄했다.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가 황제에게 탄원하자 황제는 세 사람(치릴루스, 멤논, 네스토리우스)을 모두 해임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시민들이 동요하자, 황제는 치릴루스와 멤논을 석방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추방시켰다.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이 기거했던 옛 수도원에서 4년 동안(431~435) 지내다가 아라비아로, 그리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스에 있는 오아시스로 추방되었다. 20세기 초에 시리아어로 된 「헤라클리데스의 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네스토리우스가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불태워버릴 것을 염려하여 익명으로 쓴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문제와 똑같은 문제가 서방에서 먼저 발생했다. 그 결과 레포리우스가 단죄를 받았다. 아프리카로 도망간 레포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났다. 레포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움을 받아 이단에서 풀려나 다시 교회로 되돌아 왔다. 황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에페소 공의회 초청장을 보냈으나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은 뒤였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가 에페소 공의회에 참석했었다면, 네스토리우스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테오토코스’ 칭호 인정

네스토리우스는 유배지에서 테오토코스의 칭호를 인정했다. 하지만 문제가 악화되기 전에 비판자의 주장을 경청하여 현명하게 신학적인 사고를 하여 자신의 독단적인 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 신학자는 자신의 사고와 사상만을 독단적으로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항상 반대자의 비난에 대해서도 경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진리에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길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법과 주장만을 절대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간의 사고와 범주로 제한시키는 결과가 된다. 네스토리우스 문제는 신학자들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묵상케 한다.

교회가 단죄라는 서슬 푸른 칼날을 휘두르는 것만이 문제해결을 위한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항상 인자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형제애를 발휘하여 이해하고 감싸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인간이 그르친다면 우리는 그의 잘못만을 꾸짖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자체는 언제나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단죄는 결코 복수가 되거나 잔혹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정의의 안목으로 절제되어야 한다』(「마니교도 아디만투스 논박」 17).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죽어가면서까지 정통 그리스도교를 사랑하고 또 정통 그리스도교 안에 남아 있고자 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정통 그리스도교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정통 그리스도교가 무지 때문에 나를 거슬러 싸우고, 또한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해도』(네스토리우스, 「헤라클리데스의 책」, 95).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