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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토착화를 향해] (17) 아시아 각국의 토착화 현황 (2) 필리핀 교회의 전례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3-11-02 수정일 2003-11-02 발행일 2003-11-02 제 2371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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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와 ‘혼인예식’ 토착화 노력 20년
많은 문화적 특성 미사안에 통합
‘신자인 동시에 필리핀 사람’ 인식
대중 신심, 신앙생활에 활기 선사
필리핀 교회의 역사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1521년 마젤란의 상륙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됐다. 스페인은 당시 서로 적대시하는 필리핀의 작은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수도자들을 파견했고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후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최초의 주교로 임명돼 교회 회의를 개최하고 교회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여러 종족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프랑스 혁명의 이상이 전파되면서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태동했고 결국 1898년 독립을 선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쳐 필리핀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1902년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필리핀 독립교회」가 설립돼 다른 교의나 전례는 모두 로마 가톨릭과 같으면서도 교황을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의 분파를 형성해 유지되고 있다.

한편 미국은 1907년 필리핀에 자치권을 부여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으며 이듬해에는 필리핀 연방 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이러한 일정은 중단됐고 1945년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이듬해 총선을 거쳐 필리핀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필리핀 가톨릭 교회는 400여년 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가톨릭 신앙과 종교적 실천을 유지해왔다.

전례 생활의 변화

19세기 필리핀 가톨릭 신자들이 참례했던 전례의 유일한 형태는 트리엔트 전례서의 규정에 따른 전통적인 경신례로 토착화의 노력은 거의 없었다.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는 1909년 벨기에에서 시작된 전례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에는 신자들을 위한 전례서와 독서가 몇 개 지방언어로 번역됐지만 평신도가 전례봉사를 하고 화답송과 성가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다른 아시아 지역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공의회 개혁 뒤의 일이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우선 전례 개혁에 대한 요구와 인식의 증가이다. 전례 개혁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전례 세미나가 열렸고 라디오 등 대중 매체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아울러 평신도의 영성 쇄신을 위한 꾸르실료 운동을 통해 신자들은 주일 미사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활성화됐다.

공의회 직후에는 다소간 혼란스러운 현상이 나타났는데, 일부 학교나 수도회, 신학교 등에서 미사를 실험적으로 드리기 시작했고 70년대에는 미사 때 비공식 전례문과 성서 외의 문헌들을 독서에 사용하기도 했다. 때로는 대중 가요를 미사 성가로 부르기도 했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는 그 지역의 음식과 음료를 빵과 포도주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일부 사제들은 규정에 따른 제의를 입지 않고 미사를 봉헌했다.

이러한 혼란은 80년대, 미사의 의미와 규정에 대한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진정됐다. 1990년 필리핀 주교회의는 「성찬례 지침」을 통해 교황청의 미사에 관한 공식 규범을 정리하고 그 규범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밝혔다. 1999년에는 「교회 건축에 관한 전례적 지침」을 승인했고 같은 해 「로마 미사 전례서에 대한 필리핀 교회의 보완 규정」이 발표됐다.

공의회 후 주목할만한 변화는 평신도들이 전례 봉사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평신도 봉사자들은 복사, 독서, 해설, 성체 분배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올해 1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4세계 가족모임 참가자들이 미사에 참례하며 교회와 사회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되새기고 있다.

전례 토착화를 위한 노력들

필리핀 교회는 로마식 경신례를 필리핀 사람들의 문화, 사회적 토양에 접목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는 전례 토착화의 핵심적 질문이다. 지난 20년간 필리핀 교회는 전례학자, 신학자, 성서학자, 언어학자, 문화인류학자, 사목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제에 매달려 왔다. 그리고 그 성과는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교황청에 승인을 요청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필리핀 사람들의 미사」와 「혼인 예식」이다. 이 두 가지는 한 민족의 문화와 전통이 어떻게 로마 전례와 접목돼 교회 전통과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필리핀 주교회의가 두 가지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했지만 「혼인 예식」이 1983년 교황청에 의해 승인된 것과는 달리 1976년 교황청에 제출된 「필리핀 사람들의 미사」는 아직도 승인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의 미사」는 미사에 대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이 기준들은 한 마디로 미사의 고유한 특성과 가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필리핀과 필리핀 사람들의 가치와 경험, 관심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깊은 신앙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드러내며, 경건한 기도 분위기 안에서도 필리핀의 축제 형식의 미사 거행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 문헌에서 눈에 띄는 것들 중 하나는 시작과 마침 예식 때 커다란 십자가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나중에 찬미의 노래로 십자가를 공경하는 것이다. 또 필리핀의 문화 전통에 따라 사제는 회중에게 성체를 나눠 준 뒤 성체를 모신다. 그것은 환대와 어버이다운 관심의 가치를 필리핀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섬겨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그밖에도 「필리핀 사람들의 미사」는 언어와 관용어, 말씨 등에 있어서도 타갈로그어 전문가와의 긴밀한 협의를 거치고 필리핀 언어와 문화 전통을 최대한 살리는 등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사를 필리핀 사람들의 일상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서 많은 필리핀의 문화적 특성들이 미사 거행 안에 통합됐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가 「필리핀 사람들의 미사」가 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필리핀의 문화 전통에 모두 충실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토착화된 「혼인 예식」은 1983년 교황청의 승인을 얻었는데 필리핀의 혼인과 관련된 전통 양식과 교회의 혼인 예식을 조화롭게 결합시키고 있다.

지난해 9월 마닐라 근교 퀴아포에서 열린 연중 축제에서 많은 필리핀인들이 검은 예수님 상을 둘러싸고 있다. 이 상은 16세기 초 스페인 신부가 필리핀으로 들여왔다.

대중 신심 행사들

필리핀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대중 신심에 대해서 빼놓을 수 없다. 필리핀 교회에서는 공식적인 전례보다도 오히려 대중 신심들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전례가 필리핀 문화와 괴리를 보일 때 필리핀의 문화에 보다 가까운 대중 신심들이 활성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전례운동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전례 개혁이 도입됨으로써 이 괴리가 상당히 좁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대중 신심 중에서 성탄 대축일 전 새벽미사는 주목할 만하다. 필리핀에서는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며칠 동안 새벽미사와 성야 행사를 거행하는데, 이는 스페인 선교사들이 농부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른 시간에 미사를 했다고 한다.

「심방 가비」(Simbang Gabi)는 마리아를 기리는 9일간의 새벽미사이고 「파눌루얀」(Panuluyan)은 자정 미사 전인 12월 24일 저녁에 거리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다. 이는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여관을 찾아다닌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필리핀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환대가 마리아와 연결된다. 즉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거절하는 것은 마리아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성주간에는 성모 마리아 상을 중심으로 수난을 겪은 성인들의 상을 실거나 장식한 수레를 끌고 행렬을 한다. 성모상 앞을 행진하면서 묵주 기도를 바치고 찬미가를 부름으로써 성모님의 슬픔을 함께 나눈다.

부활대축일 새벽의 만남 행사는 필리핀 마리아 신심의 절정이다. 검은 천으로 가린 마리아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상을 모신 행렬이 마을 광장에 모여 마리아가 부활한 아드님을 만나는 것을 기념한다.

필리핀 교회는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있다. 필리핀 교회는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인 동시에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 선교사들에게서 받은 신앙에 자신들 고유 문화와 전통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한다. 토착화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필리핀 사람들 자신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