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의 가르침 (45)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 최원오 신부

최원오 신부(부산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3-10-19 수정일 2003-10-19 발행일 2003-10-19 제 236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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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의 길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354년). 그의 어머니는 성 모니카이다. 라틴어 문법과 「말 잘하는 기술」(修辭學)에 뛰어났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열 여섯의 나이에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을 갔다(370년).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거에 들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얼마 있지 않아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었다(370/1년경). 떳떳하지 않은 동거 생활은 1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370~384년).

열 여덟 살 나던 무렵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서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에 빠졌다(372/373년). 이제 세상 것들에 대한 애정은 시들해지고,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철학적 관심으로 성서도 읽어보았지만, 그 문체나 내용이 유치하게 느껴졌기에 금세 덮어 버리고 말았다.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다(373년).

그 이듬해에는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374~383년). 그 아홉 해 동안 마니교 이단에 기웃거렸지만, 결국 마니교의 어설픈 교리 체계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낙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서 수사학을 가르쳤다(383년). 한동안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懷疑主義)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밀라노 황실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다(384년).

회심과 세례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축사를 멋지게 꾸밀 수 있을까 고심하며 밀라노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때마침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순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고달프게 추구하고 있는 인생의 거짓 행복이, 거지가 이미 맛보고 있는 작은 행복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노에는 그 유명한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있었다. 맘의 동요를 심하게 느끼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성서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쳐 갔다. 게다가, 황실의 높은 벼슬아치 폰티치아누스가 들려준 수도승 안토니우스에 얽힌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다. 복음의 권고대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나선 수도승들의 삶에 비해, 아직도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괴로워서 무화과나무 밑에 홀로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리며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옵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제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라고 울부짖고 있을 때,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어린아이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바울로 서간집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포식과 폭음,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새움을 멀리합시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정을 만족시키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로마 13, 13~14). 이 한 말씀에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흘렀고, 모든 어두움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386년). 마침내 하느님의 사랑에 눈뜬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7년 부활 성야(4월 24일 밤)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모니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아데오다투스,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시우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다.

수도승 생활과 사제 생활

고향 타가스테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88년). 그리고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면서 단식과 기도와 선행에 전념했다(388~391년).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온전히 수도생활에만 매달리고 싶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혹시라도 교회의 공직을 맡게 될까봐 늘 두려워했다. 한 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북아프리카 제 2의 도시 히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연로한 발레리우스가 주교로 있었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발레리우스 주교는 자기를 도와줄 사제가 당장 필요하다고 강론 중에 하소연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성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알아본 신자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몰려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발레리우스 주교 앞에 억지로 데려간 그들은 사제품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이라 받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늦깎이 신부가 되었다(391년).

그는 사제품을 받으면서 자기 주교의 허락을 얻어 주교좌 성당 옆에 수도원을 세웠다(391년). 사랑과 겸손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수도 생활과 사제 생활을 함께 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발레리우스의 뒤를 이어 히포의 주교가 되었다(397년).

참된 사목자이며 탁월한 사상가로서, 모든 교부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복음적인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을 줄을 몰랐다. 병이 깊어져 이 세상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는 다윗의 참회 시편 일부를 옮겨 적어 벽에 붙이게 하고는, 침대에 누운 채 날마다 그것을 되새기고 읽었으며,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40년 가까이 사제와 주교로서 교회를 섬긴 아우구스티누스는 430년 8월 28일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말 번역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 1999.

포시디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이연학?최원오 옮김, 분도출판사(근간).

최원오 신부(부산가톨릭대 교수)